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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의 사랑법 20] 문장 안의 사랑 ‘둬룬루 문화거리(多伦路文化街)’

[2024-12-28, 07:55:39] 상하이저널

돌아선 연인의 뒷모습이 희끄무레해질 때 발걸음이 둬룬루로 향했다. 한때 일본 조계지였던 둬룬루 문화거리에는 30년대 중국의 유명한 문화계 인사들과 혁명단 청년들이 자주 모였던 집과 차관, 카페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루쉰(鲁迅), 마오둔(茅盾), 궈모뤄(郭沫若), 로우스(柔石), 펑쉐펑(冯雪峰)… 작가는 죽었지만, 그들의 문장은 누군가에게 읽히며 여전히 살아있다.

실제 일어났던 일이나 문장을 쓴 사람의 진심보다 남아 있는 문장 한 줄이 더 진실로 여겨지기도 한다. 처음 본 남자를 보고 사랑에 빠진 다음 날, 군부대로 남자 친구 면회를 하러 갔다. 그동안 날마다 써 보냈던 편지 묶음을 받아 돌아온 후에야 그에게 이별을 통고했다. 사랑한다는 고백이 담긴 문장들이 모두 찢기고 타 버려 재가 된 후에야, 비로소 옛사랑이 소멸하였음을 보고 안심했다. 반대로 회수되지 못한 연애편지 속 ‘사랑해’라는 문장은 여전히 살아있다. 편지를 쓴 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결혼해 아이 몇을 낳았다 해도 편지의 수신자는 여전히 믿을 수 있다. 문장이 남아 있으므로, 그 사랑은 진실이라고.


계획에도 없던 문장들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기도 하고, 초월적인 목소리를 그저 받아 적기도 하니, 문장은 내 자궁을 빌려 태어난 자녀처럼 나를 통해 태어났지만 내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한번 태어난 문장은 나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운명을 지니고 살아간다. 문장과 나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멀어진다. 배움 없이 초라한 어미는 자식에게 어미를 떠나 저 먼 곳으로 갈 것을 명령한다. 어미의 이름을 모른다 해도 괜찮다. 무너져 내리는 초라한 이 어미 따위 기억하지 말고, 너는 아름답고 찬란하게 살아남으렴.

“뛰어난 예술가들은 단지 그들의 작품 속에 존재하고, 결과적으로 그들 자신은 완전히 지루한 사람으로 남거든. 훌륭한 시인, 참으로 훌륭한 시인은 모든 존재 중에서 가장 시적이지 않은 것처럼 말일세.”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중)


시간의 흐름 앞에 제아무리 허리를 꼿꼿이 세운다 해도, 머리숱은 줄어들고, 눈꺼풀은 내려앉으며, 주름은 세월이 새겨놓은 음각처럼 선명해진다. 도리언 그레이는 캔버스에 그려진 자신의 초상화가 죄악의 무게를 모두 짊어지도록 하고, 그 자신은 훼손되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남길 원했다. 나는 내 문장이 흠 없이 온전한 아름다움으로 남기를 원한다. 그 결과로 나 자신은 추악하고 재미없는 껍데기로 남게 된다고 할지라도. 내 글이 나보다 아름답기를….

돌아선 연인의 잔영마저 시나브로 사라졌다. 연인이 사라져도 그의 문장은 여전히 남는다. 문장을 보고, 문장의 향기를 맡고, 문장에 입 맞추고, 문장을 어루만진다. 말과 문장의 부박함을 알고 늘 경계하며 살아야 하지만, 말을 통과하지 않고서 어찌 마음의 끝에 가닿을 수 있겠는가. 참을 수 없도록 가벼운 문장의 성질을 잘 알면서도, 오늘도 무너져 내리는 내 마음과 존재의 끝을 문장 한 줄에 힘겹게 비끄러맨다.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위챗: @m istydio, 브런치스토리 @yoonsohee0316)
master@shanghaibang.com    [윤소희칼럼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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