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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상하이 108] 내가 화가다

[2021-05-14, 06:44:35] 상하이저널
정일영 | 아마존의나비 | 2019.05.20
정일영 | 아마존의나비 | 2019.05.20

한 여성이 시녀의 도움을 받으며 남자의 목을 베고 있다. 여성의 얼굴은 강인하며 힘이 넘친다. 튼튼한 근육질의 팔뚝 아래로 남자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왼손, 그리고 칼을 쥔 오른손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결연해 보인다. 바로크 시대 대표 여성 화가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이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같은 제목,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자. 유디트는 연약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한 소녀의 모습이다.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처단하는 유디트는 홀로페르네스를 끔찍한 듯 바라보며 흠칫 몸을 뒤로 빼고 있다. 젠틸레스키의 '유디트'의 강인함, 결연함은 없다. 카라바조는 유디트의 아름다움을 더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인 듯 옆에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나이 많은 하녀를 그렸다.

 카라바조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젠텔레스키의 '유디트'는 연약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남성의 성적인 욕구의 대상이 아니라 냉철, 강인, 결연, 용맹, 에너지가 넘치는 여전사의 이미지이다. 카라바조의 어두운 색조와 빛의 효과에 영향을 받았으나 남성인 그와는 다르게 이전의 서양미술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강력한 여성상을 그려냈다. 

1630년쯤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회화의 알레고리로서의 자화상"에서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그림에 열중하는 모습에서 화가로서의 굳건한 자의식이 느껴진다. 젠텔레스키 또한 상처와 역경을 내면의 힘으로 승화한 강한 여성이었음이 분명하다.

서양미술 작품 속 '그려진 여성'은 기본적으로 매우 아름답다. 그러나 수동적이고 때로는 역설적이다. 여성은 객체화되고 타자화된다. 그래서 남성 관객의 욕구에 봉사한다.

 코레조의 "제우스와 이오"


코레조 작, "제우스와 이오"에서 제우스에 속아 겁탈당하는 이오는 어처구니없게도 황홀한 표정이다. 신 중의 신 바람둥이 제우스를 합리화하기 위한 발상은 아니었을까? 

 장 레옹 제롬의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장 레옹 제롬이 그린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성적 대상으로 표현된 여자일 뿐이다. 아름다움에 영리함 그리고 냉철한 결단력까지 갖춘 엄연한 파라오였음에도 말이다.

 메리 커셋의 "오페라 관람석에서"


그러나 작품 "오페라 관람석에서"를 통해서는 불편한 진실을 그려낸 메리 커셋같은 화가도 만날 수 있다. 오페라 극장의 관람석, 검은색 드레스로 성장한 한 귀부인이 오페라글라스를 통해서 진지하게 무대 쪽 무엇인가를 '보고' 있다. 저 멀리 떨어진 좌석에서 몸을 이쪽으로 틀고 절반이나 난간에 걸친 노골적인 자세로 역시 오페라글라스를 통해 이 귀부인을 '훔쳐보고' 있는 한 남성이 포착된다. ‘훔쳐보임’을 당하지만은 않는, 스스로 '보고' 있는 호기심 많은 여성의 모습이 당당하다. 메리 커셋은 훔쳐보기는 자연적 본능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시선이 곧 권력'이라는 푸코의 통찰을 일깨워준다. 

프리다 칼로의 "원숭이와 함께 한 자화상"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는 20세기 가장 유명한 여류화가 중 한 명이다. 이름 프리다는 '평화'를 상징한다는데, 삶이 어떻게 이렇지? 싶을 정도로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았다. 혁명, 운명 그리고 승화. 그녀의 삶도, 그림도 너무나 강렬하다.

브라보는 "그녀는 스스로를 잉태한 유일한 화가다"라고 평가했다. 미술사에 전례가 없는 충격적 작품 <나의 탄생>과 딱 맞아떨어지는 말이다. 나의 몸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나, 침대 머리 쪽 벽 액자 속에서 그의 어머니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아! 충격적이다, 그리고 슬프다.

저자는 출산 장면을 묘사한 남성 화가의 그림이 있었는가 묻고 단 한 점도 없다고 답한다. 이는 여성 성기에 대한 혐오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더 나아가 어쩌면 진정한 '세상의 근원', 여자 포궁에 대한 무의식적 두려움이 더 큰 이유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녀가 사망한 해인 1954년 작 중 하나인 <인생만세>. 파란만장한 삶의 고난과 질곡의 시간을 지나온 그녀의 그림은 비로소 소박하다, 평온하다.

 

 프리다 칼로의 "인생만세" (VIVA LA VIDA)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으나 독일의 케테 콜비츠는 이웃의 고통스런 삶이 보편적이고 구조적인 사회 문제임을 직시한 화가다. 콜비츠에게 삶은 곧 예술이었고 예술은 곧 삶이었다. 베를린 노이어 바헤에 전시된 콜비츠의 <피에타>는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현란한 솜씨를 부리지 않고 단순하며 절제되어 있지만 먹먹한 가슴의 울림은 훨씬 더 크다.

콜비츠와 칼로는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는 같았지만, 칼로가 자기만의 고통에 집착한 반면 콜비츠는 전쟁과 비참, 여성들의 고통스런 현실에 주목했다.

역사적으로 여성은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서 있었으며 미술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여성은 심각한 차별과 부당함을 힘겹게 겪어야 했다. 여성화가는 교육과 참여의 기회에서 제외됐다. 혹 재능있는 여성 화가가 남성 중심 사회에 반기라도 들었다가는 악의적으로 폄훼당하거나 부풀려지고 왜곡된 스캔들을 감내하거나 혹은 결국 붓을 꺾어야 했다. 남성 위주의 미술계에서 여성 화가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참으로 지난한 길이었으리라.

그럼에도 자신의 삶과 예술의 세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꿋꿋하게 열어나간 여성 화가들은 분명히 '있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은 어떤 명화, 명작보다 더 가치 있고 아름답다.

오세방

외국에 살다 보니 필요한 책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책벼룩시장방이 위챗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9월부터 한 주도 빼놓지 않고 화요일마다 책 소개 릴레이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아이의 엄마로, 문화의 소비자로만 사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상해 교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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