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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이야기] 그때 그 상장

[2019-11-14, 14:43:18] 상하이저널
오늘따라 유난히 햇살이 눈 부셔 창 밖을 내다보았다. 아침 햇살에 반사된 수로 표면의 물결들이 황금빛으로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그 물결을 보고 있자니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4교시를 마치고 하교한 나는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포스터 그리기 숙제를 하기 위해 종이와 자를 꺼내놓고 구상에 들어갔다. 방바닥에서 하기 시작한 작업은 생각보다 길어져서 다음 날 저녁까지 이어졌다. 다리도 저리고 힘들었지만, 완성도에 꽤 만족스러웠다. 그런 나를 보시며 엄마는 주말에 다른 것은 하나도 않고 그림 숙제만 하냐며 나무라셨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동생을 보호하는 자 혹은 엄마의 주방 조수였다. 마땅히 내세울 종목이 없어 기를 펴지 못하는 둘째요, 언니에게는 자랑할 게 없어 부끄러운 동생이었다. 집안에서 차지하는 나의 위치는 남동생보다도 하수였다.

독서를 기피했기에 나만의 철학을 갖는 것 따위의 일은 한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뉴스로 보고 듣는 사회는 언제나 위험하고, 믿을 것이 못 돼 보였다. 그 시절 나 혼자의 힘으로 내가 ‘존재 자체로 특별하고, 나이기에 존엄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는 없었다. 나는 자신을 한없이 혐오했으며, 공상의 나래를 펼쳐 피신했다.

포스터를 제출하고 며칠 후, 선생님께서 나와 정우정을 교탁 앞으로 부르셨다. 웬일인가 의아해하며 앞으로 나갔다. 정교하게 그려낸 내 포스터와 우정이의 것으로 보이는 큼직큼직한 디자인의 시원한 민트 색감 포스터 2장이 교탁 위에 놓여있었다. 선생님은 부모님 도움 없이 혼자 그린 그림이냐고 물으셨다. 나는 조그맣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너무 잘 그려서…” 말끝을 흐리는 선생님께서 고민을 잠시 하시다가 알았다고 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듣고, 상장을 받겠거니 하며 기대했다.

6학년 1반 부반장이었던 정우정은 비율 좋은 큰 키에 탤런트나 입을 법한 옷들을 완벽히 소화하는 비주얼 퀸이었다. 물기 어린 목소리로 자기 생각을 조리 있게 표현하며, 학급 일도 잘 이끌어나갔다. 그런 캐릭터를 처음 접한 나는 그녀의 모든 것이 문화 쇼크로 다가왔다.

드디어 포스터 그리기 상장의 주인공이 호명됐다. “정.우.정” 우정이는 능숙하게 박수를 받으며 앞으로 걸어 나와 상장을 받았다. 나는 그 순간 내 중심을 통과해 나를 붙들어 매주고 있던 것이 터져버려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지는 구슬처럼 온 사방으로 튀어버렸다. 나를 믿어주셔야 했던 선생님은 내게 손들어주지 않으셨다. 나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자가 더 갖는 불공정한 힘의 논리 앞에 무기력해진 채로 어린이 시절을 건넜다. 

나는 서예학원으로 가는 가로수 길을 좋아했다. 그 길의 플라타너스는 여름이면 그늘을 드리웠고, 가을이면 커다란 낙엽들이 바닥에 쌓여 바스락 소리를 냈다. 그 길을 걸어가며 머지않은 날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늘 행복할 것을 소망했다. 집으로 돌아갈 때면 일몰을 향해가는 태양이 나를 따라오며 가로수 사이로 반짝였다.

그 황홀한 주홍빛은 여기 상하이에서 딸 아이와 함께 바라보는 노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 상장을 받았더라면 지금 얼마나 더 나은 내가 되어있을지 궁금해진다.

여울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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