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양=연합뉴스) 조계창 특파원 = "추석이라지만 명절 분위기를 좀체 느낄 수가 없네요."
'차이나드림'을 꿈꾸며 중국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실패를 맛보고 오갈 곳없는 처지로 전락한 한국인들에게 추석은 끔직한 악몽과 다름 없었다.
추석을 맞은 6일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시 시타가(西塔街)의 한 한국인 쉼터.
이곳에서는 돈이 없어 귀국을 하지 못하는 한국인 3명이 아침부터 한국 TV에서 방영하는 추석 특집 방송을 보면서 향수를 달래고 있었다.
중국에서 치과병원을 개업했다가 동업자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길거리로 나앉게 된 박모(70)씨는 "이제 중국이라면 치가 떨리지만 고향 대구에도 가지 못하고 이렇게 쉼터에서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다"며 쓸쓸한 표정으로 넋두리를 늘어 놓았다.
치과기공사 출신으로 5년 전 중국으로 건너온 박씨는 지난 8월10일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병원의 주인이 바뀌는 황당한 사건을 겪었다. 병원 명의를 중국인 의사 앞으로 해놓은 것이 화근이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뒤 숙소를 겸하고 있는 병원으로 찾아갔지만 현관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뇌출혈로 몸도 불편한 데다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그는 10위안(약1천200원)짜리 발안마방을 전전하다 결국 숙식비가 모두 무료인 쉼터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박씨는 이날 아침 한 한국인 교회에서 보내준 떡을 받고서야 "이제 추석 분위기가 느껴지네"라며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박씨와 함께 쉼터에서 묶고 있는 한 40대 한국인 남성은 "중국에서 사업에 실패한 내 친구 1명도 싸구려 민박집에서 추석을 맞았다"며 "오늘 아침 통화를 했는데 송편도 먹지 못하고 쓸쓸히 추석을 보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가슴이 아팠다"고 귀띔했다.
중국 선양에서는 박씨처럼 여러 가지 이유로 사업에 실패하고 노숙자와 다름없는 빈털터리로 전락한 한국인들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한국인 기업인 김모 회장은 "작년말 선양시 정부의 한 관계자로부터 '선양에서만 생계가 곤란한 한국인이 100∼150명에 달한다'는 얘기를 듣고 문제가 심각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특히 재작년 선양에서는 사업을 하다 실패한 한국인 한 명이 비행기 값이 없어 귀국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며 도움을 호소하다 울분을 느끼고 영사관 건물에서 투신 자살한 사건이 발생해 이곳 교민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주기도 했다.
서탑에서 의류가게를 운영하는 조선족 김모(29)씨는 "가게에 자주 들러 물건을 사가던 한국 단골 손님들이 어느 날 갑자기 불쑥 찾아와서 100위안(약1만2천원)이나 200위안(약2만4천원)씩 푼돈을 빌려 간 뒤로 모습을 감추는 일도 종종 있었다"며 "숙박비를 떼어먹고 민박집에서 야반도주를 하는 한국인들도 많다"고 귀띔했다.
선양에서 한국인은 부자 나라의 국민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겉보기와 달리 일부 교민들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은 암울하기만 하다.
재선양한국인회의 한 관계자는 "사업에 성공한 일부 교민들이나 주재원을 제외하고는 당장 100위안이 아쉬운 형편인 교민들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얼마 전에는 자녀를 세 명이나 데리고 있는 한국인 부부의 딱한 사정이 알려지면서 한국인 교회 차원에서 모금 운동을 벌인 적도 있었다.
어려운 고비는 넘겼지만 현재 이들 가족은 월 3천위안(약36만원) 정도의 수입을 갖고 근근이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인 쉼터를 운영하고 있는 상근 자원봉사자 조현씨는 "선양의 경우 한국에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들어온 사람들이 많아 그만큼 이곳에서도 어렵게 생활하는 한국인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며 "국가 이미지 차원에서 이들에게 좀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