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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570돌을 맞으며

[2016-10-09, 04:02:48]

[우리말 이야기 35]

한글날 570돌을 맞으며


1. 한글날의 유래

한글날은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세종실록에는 ‘1446년 9월에 반포했다’고만 적혀 있기에, 조선어연구회가 나서서 1926년 음력 9월의 마지막 날인 양력 11월 4일을 제1회 ‘가갸날’이라고 이름 붙이고 기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2년 뒤에는 ‘한글날’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1940년 안동에서 비로소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에 실린 정인지 서에 ‘9월 상한(상순)’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후 이때를 양력으로 따져서 10월 9일을 한글날로 삼았습니다.

 

올해로 570돌을 맞는 한글날, 이날이 다가오면 신문 방송마다 다투어 특집을 내보냅니다. ‘바른 우리말을 쓰자’, ‘아름다운 우리말을 지키자’, ‘무분별한 외래어 외국어를 몰아내자’…… 물론 좋은 뜻이기는 하나 좀 엉뚱합니다. 왜냐하면 한글날은 우리말이 아닌 표기수단으로서의 한글, 즉 훈민정음이라는 ‘문자’가 세상에 공식적으로 선보인 것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말은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수천 년 전부터 이 땅에 뿌리내린 우리 선조들이 쓰던 말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다만 훈민정음 이전까지는 표기수단이 없었기에 한문을 통째로 갖다 쓰거나, 한자의 뜻과 소리를 빌린 이두를 만들어 쓰기도 했습니다. 물론 수많은 백성들은 어려운 한자를 익힐 수 없어 까막눈이 신세를 면하기 어려웠지요. 그것을 못내 안타까워한 세종이 우리말에 딱 맞는 글자를 만들어 ‘어린 백성들까지도 제 뜻을 펼칠 수 있도록’ 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 한글날입니다.


2. 훈민정음을 못마땅하게 여긴 박지원과 정약용

‘훈몽자회’를 쓴 최세진을 비롯하여 ‘훈민정음 운해’를 쓴 신경준, ‘주영편’을 쓴 정동유, ‘언문지’를 쓴 유희 등 훈민정음의 가치를 소증히 여기고 연구하여 체계를 세운 학자들도 적지 않으나, 조선시대 한학자들은 대부분 훈민정음에 인색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를 정면으로 반대한 최만리 같은 사람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실학자로서 양대 거두라 할 만한 박지원이나 정약용 같은 사람들조차 그러했다는 사실은 뜻밖이거니와 씁쓸하기 그지없습니다.

 

“박제가, 박지원, 정약용 등 상당수의 실학자들이 언문을 쓰지 않은 이유는 ‘중화주의’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실학자인 박제가는 아예 조선말을 버리고 중국어를 공용어로 삼자고 했다. 박지원도 열하일기에서 중국의 언문일치를 부러워하면서 되레 우리의 언문으로 번역하는 문화를 비판하고 있다. 정약용은 조선이 이미 중화의 정치와 학문을 실현하는 국가라 생각했기 때문에 언문 사용은 중화주의적 학문, 또는 삶의 태도에 위배된다고 보았다.”(김슬옹 지음, ‘조선시대의 훈민정음 발달사’에서)

 

실학자들의 이 같은 사대주의적 발상을 보면, 당시의 실학은 백성들의 실생활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왕도정치라는 양반 계급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됩니다. 다만 박지원은 죽을 때 자신이 한글을 전혀 모르는 탓에 잦은 여행 중에도 ‘언문밖에 모르는’ 아내와 속정이 담긴 편지 한 장 제대로 주고받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는 일화가 있기도 합니다.


3. 한글 가로 풀어쓰기와 컴퓨터

지금은 거의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지만, 197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우리말을 가로 풀어쓰자’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주욱 이어 쓰기만 하면 되는 로마자처럼, 한글도 초중종성을 위에서 아래가 아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어 쓰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신문사나 인쇄소 조판실에 가 보면 식자공들이 활자 수천 개 중에서 알맞은 글자를 일일이 찾아 조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대문자 소문자 합쳐 활자 50여 개면 충분한 로마자에 비해, 한글은 초성 19개, 중성 21개, 종성 28개를 조합해야 완전한 글자꼴을 이룹니다. 이에 따라 전혀 쓰이지 않는 글자를 빼도 기본적으로 활자 3~4천 개는 있어야 하기 때문에 아무리 능숙한 식자공이라도 입력 속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타이프라이터를 칠 때에도 종성 즉 받침을 입력할 때는 윗글쇠를 눌러줘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을 뿐 아니라, 중성의 위치가 오른쪽과 아래쪽으로 오락가락하는 데다가 받침의 유무에 따라 글자 모양이 들쭉날쭉하여 모양이 나지 않음은 물론이고 읽기에도 불편하다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이런 점이 한글의 기계화를 방해하고, 그만큼 우리 문화와 산업의 발전에도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 한글 연구의 선구자 주시경과 그 제자 최현배 등 여러 학자들은 해결책으로 ‘한글 가로 풀어쓰기’를 주장했습니다. 로마자를 흉내 내서 가로 풀어쓰기를 하면 입력 속도도 빨라지거니와 활자의 수도 획기적으로 줄여 인쇄와 출판에 혁명을 불러올 것으로 본 것이지요.

 

이들이 한창 한글 연구에 몰두하던 그 무렵, 터키에서는 1923년 정권을 잡은 ‘아타튀르크’ 케말이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복잡한 아랍어 표기를 버리고 단순한 로마자 알파벳을 도입하는 ‘문자 혁명’에 성공한 일이 있습니다. 이후 터키는 이슬람 국가로는 보기 드물게 문화와 산업의 ‘서구화’에 성공했는데, 이 일이 우리 학자들에게도 자극을 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워드프로세서가 등장하면서 우리에게도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자판으로 입력하면 자동으로 조합한 자연스러운 글꼴이 좁은 화면에 나타나고, 그걸 다시 프린트할 수도 있는 워드프로세서는 글 쓰는 사람들에겐 대단한 ‘물건’이었습니다. 곧 이어 자연스럽게 다양한 글자 모양을 만들어 주는 컴퓨터까지 대중화되자, 한글을 가로 풀어쓰자는 주장은 저절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한글이 음소문자이면서도 음절문자의 특징까지 지니게 한 것은, 세종이 500년 앞을 내다본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컴퓨터 시대가 되니 그동안 고민이었던 입력의 어려움이 단번에 해소되었을 뿐 아니라, 가로 이어 쓰는 로마자가 지니지 못한 뜻글자로서 음절문자의 장점이 더욱 돋보이게 된 것입니다.


4. 한글을 연구하는 외국 학자들

한국어가 아닌 한글, 즉 한국어의 표기 방식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꽤 있습니다. 이들은 굳이 언어학자가 아니라도 한글이라는 표기 방법의 과학성과 실용성에 감탄합니다.

 

중국 개화기의 정치가 위안스카이는 정권을 잡은 후 한때 우매한 서민들을 위해 한글 표기를 도입하자고 한 적이 있고, 역시 중국 인민의 미개함을 안타까워한 소설가이자 사상가 루쉰은 그 미개를 깨우치기에 딱 좋은 훈민정음을, 하필 중국 아닌 저 조그만 조선 땅에서 만들어냈느냐며 아쉬워했습니다. 갖다 쓰자니 자존심이 상한다는 탄식이었지요. 이후 중국은 문자 개혁에 나서서 획수를 확 줄인 간체자를 만들었고, 발음은 주음부호를 써서 따로 적다가 최근에 와서야 로마자 표기방식을 도입했습니다.

 

성경을 보급하려고 번역에 나섰던 조선시대 말 서양 선교사들은 한글 표기법의 과학성을 깨닫고 체계적인 사전을 만들어 개화기 이후 한글학자들의 연구에 바탕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특히 1960년대 이후부터는 한글이라는 표기 체계의 합리성에 주목하는 언어학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발성방법을 서양보다 무려 500년이나 앞서 완성한 체계적 음운이론과, ‘ㄱ-ㅋ-ㄲ’, ‘ㅏ-ㅑ/ㅐ-ㅒ’로 이어지는 단순하면서도 체계적이어서 배우기 쉬운 표기 방식 등 다른 문자가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과학성과 실용성에 감탄하여 ‘한글은 언어학적 사치’라고까지 얘기합니다.

 

지리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기하학적으로 단순하며 체계를 갖춘 한글 표기의 과학성과 탁월성’을 다룬 논문을 발표하는가 하면, 20세기의 고전으로 평가 받는 ‘총, 균, 쇠’와 ‘제3의 침팬지’ 같은 저서의 서문에서도 ‘인간 창조성과 위대성의 기념비’라는 표현을 써 가며 한글을 기렸습니다. 또 최근에는 일본 언어학자 노마 히데키가 ‘한글의 탄생-문자라는 기적’이라는 한글 연구서로 일본에서 베스트셀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누가 강요하거나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한글의 대단한 점을 깨달았다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때 크게 화제가 되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난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에게 한글 표기 보급하기’ 같은 비상식적인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문화란 자연히 흘러가는 것이지 억지로 욱여넣는다고 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찌아찌아족 소동은 그저 무언가 실적을 올리고 싶어 안달 난 인간들 몇몇이 작당해서 연출한 한 편의 소극일 뿐이지요.


5. 맺음

가끔 한글이 알파벳 f, v나 g, d, b 등의 소리를 제대로 적지 못한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는데, 세종 당시의 표기법과 설명을 보면 그런 소리들까지도 다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한 한국어 발음에 맞추어 간소화했을 뿐, 표기할 방법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발성기관의 모양을 본뜬 자음, 천지인 삼재(三才)라는 우주 철학까지 담은 모음도 놀랍지만, 다 젖혀놓고 가로 세로 사선의 세 가지 직선과 원, 점이라는 기하학적 도형 다섯 가지만을 사용하여 표기할 수 있다는 단순성만 가지고도 한글은 지구상의 다른 어떤 표기법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편리함과 우아함을 드러냅니다. 게다가 한글은 만든 사람과 만든 시기, 만든 과정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인류 역사상 유일한 문자로, 얼마든지 자랑해도 좋은 우리의 위대한 문화유산입니다. 다만 그 귀한 걸 귀한 줄 모르는 후손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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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1980년 이후 현재까지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다. 1987년부터 1990년까지 <전교조신문(현 교육희망)>에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월간 <우리교육> 기자 및 출판부장(1990~1992), <교육희망> 교열부장(2001~2006) 등을 역임했다. 1989년 이후 민주언론운동협회가 주최하는 대학언론강좌를 비롯하여 전국 여러 대학 학보사와 교지편집위, 한겨레문화센터, 다수 신문사 등에서 대학생, 기자, 일반인을 대상으로 우리말과 글쓰기 강의를 해오고 있다. 또한 <교육희망>, <우리교육>, <독서평설>, <빨간펜> 등에 우리말 바로쓰기, 글쓰기(논술) 강좌 등을 기고 또는 연재 중이다.
ccamya@hanmail.net    [김효곤칼럼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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