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7월 7일의 노구교(盧溝橋, 베이징 교외)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1945년 9월 2일의 일본 항복(법적으로는 1972년 9월 29일의 중일공동성명)까지 계속된 중일간의 전면전쟁이다.
1931년 9월 18일의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한 경우 일본에서는 ‘15년 전쟁’ 혹은 ‘아시아태평양전쟁’, 중국에서는 ‘항일전쟁’ 혹은 ‘제2차 중일전쟁’ 이라고 한다. 노구교사건 후 현지에서 정전협정이 성립하였지만 일본정부는 사건을 중국측의 계획적 무력항일이라고 단정하고 총공세를 개시하여 8월 상해에 전투병력을 확대하였다. 일본측은 당초 이 전쟁을 ‘북지(北支)사변’이라고 하였지만 후에 ‘지나(支那)사변’으로 개칭하였다.
정식의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개시후 대(對)미국ㆍ영국전쟁과 지나사변을 포함하여 ‘대동아(大東亞)전쟁’으로 호칭하였다. 일본의 군사행동확대는 중국문제를 일거에 유리하게 해결하려는 호기를 노린 일본의 야심과 우세한 군사력의 일격으로 중국측을 단기간에 굴복시킬 수 있다는 오산에 기초하였다.
중국측은 항전준비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일본측의 예상에 반하여 항일의 전의를 굳히고 1937년 9월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하여 항일 민족통일전선이 형성되었다. 12월의 남경점령 후 일본군은 10만을 넘는 중국 군민을 참살하는 남경학살사건을 일으켜 국제여론의 비난을 초래하여 중국민중의 항일의식을 더욱 고양시켰다.
주화(駐華) 독일 대사 트라우트만의 중개에 의한 ‘화평공작(和平工作)’을 일본측은 1938년 1월 단행하여 ‘국민정부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제1차 근위(近衛)성명을 발표하고, 협상에 의한 해결의 길을 스스로 포기하였다. 일본이 옹립한 화북(華北)과 화중(華中)의 괴뢰정권은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일본군 점령지는 주요도시와 철도연변의 ‘점과 선’에 그쳤으며, 배후의 광대한 농촌지대에서는 중국 공산당군을 중심으로 하는 유격전이 전개되었다.
1938년 10월의 무한(武漢) 점령 후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으며 통일전선 내의 국공(國共) 양군의 대립이 격화하여 분열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일본은 국민정부 내의 대일 타협파에 대한 ‘화평공작’을 활성화시키고, 왕조명(汪兆銘) 등은 국민정부로부터 탈락하여 일본 점령하의 남경에 1940년 3월 ‘남경정부`를 수립하였으나,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독일ㆍ일본ㆍ이탈리아 3국 동맹을 체결한 일본은 미일협상 중에 일본군의 중국철수를 요구한 미국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1941년 태평양전쟁에 돌입하였다. 일본군은 三光 작전 등의 잔악한 행위로 중국의 대항전력을 철저히 파괴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1945년 110만의 병력을 중국에 남기고 항복하였다. 이로 인한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중국국민의 사상자는 1,000만 명을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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