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을 친정에서 보내게 된 나는 아버지와 동생네 식구들과 함께 아버지의 고향을 찾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산소가 있는 곳이어서 성묘도하고 큰어머니를 뵙고 오자는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날씨가 정말 겨울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따스한 햇빛으로 우리의 얼어붙어 있던 어깨를 쭉 펴게 해주고 있었다. 그다지 높은 곳은 아니어도 아버지는 숨차 하셨고, 지나가는 말로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꼭 올라가야지”라며 혼자 중얼거리셨다.
“저번에도 똑같이 말씀하셨잖아요”라는 내 말에 “그랬나?” 씩 웃으셨다.
왜 납골당을 안하시고 산에다가 이렇게 가족묘장을 만드셔서 오고가는 길을 힘들게 하셨냐고 물었다. 엄마 살아 생전에 할아버지, 할머니를 이 곳에 이장하시고, 두 분이서 자주 도시락을 싸들고 이 곳에 올라 고향마을을 내려다보며 시간을 보내셨다 한다. 엄마도 눈앞에 펼쳐져 있는 시골 집들이며, 시냇물, 주위에 피어있는 복숭아꽃, 앞산의 풍경들을 무척 즐겨 하셨단다. 그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니 노부부의 평화로운 한 장면이었다. 오랜만에 코 끝에 스며드는 시원한 산수의 공기가 내 온 몸에 스며들어 머리가 맑아지고 있었다.
성묘를 마치고 건축사일을 하고 있는 사촌동생네로 내려갔다.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지은 집이라고 뿌듯해하면서 집안 이 곳 저 곳을 안내해주었다.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많이 절었었는데 여러 번의 수술로 많이 나아져 있었다.
“다리가 많이 좋아졌네.”
“네, 누나는 여전하네요… 나이도 안 먹는거 같고….”
“뭔소리… 이젠 거울보면 내 얼굴이 낯설 때도 있어.”
집 안을 둘러보며 서먹서먹한 농담도 몇 마디 주고 받으면서 너무나 오랜만의 만남이 주는 어색함을 녹이려 서로 노력하고 있었다. 거실로 돌아오니, 아버지가 오셨다는 소식에 근처에 살고 있는 사촌들이 가족들을 데리고 많이도 와 있었다.
“오랜만이네, 고모”, “아버지뵈러 멀리서 왔네, 고모”, “건강하시요? 고모” 고모, 고모, 고모…. 내 호칭이, 아버지 고향마을에 가니, 온통 고모, 고모다. 사촌들이 많아서, 올케들이며, 조카들도 온통 고모라고 부르는 바람에 내 이름은 없어지고 난, 어느새 우리 아버지 고향에서 고모가 돼 버렸다.
“저 조카들이 내 이름을 알까? 난, 그냥 이름이 고모인거야”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가 아버지께 한 농담이다.
“아버지, 저 여기서 고모로 시의원 출마 할까봐요. 아, 괜찮은 이름 같아요, 고모!”
“오랜만에 보니깐 반가워서들 그러지, 자주 가자.”
어렸을 때, 명절 때, 엄마랑 아버지랑 들렀던 고향길은 그냥 멀고, 조금은 불편해서 빨리 떠나오고 싶던 그런 곳이었는데, 많은 세월이 흘러 찾아 든 곳인데도 나를 반겨주는 사촌, 육촌들이며 조카들이 여전히 그 곳에 있어서 좋았다. 자신들이 특별한 재주가 없어서 그 곳에 눌러 살고 있는 것이라고들 말했지만,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언제라도 쉬고 싶을 때 오라는 말도 해 주었다. 자신이 직접 재배해서 만든 감식초며, 매실을 건네주던 육촌오빠는 내 손을 잡으며,
“니, 내 알제?”
살짝 말했다.
“그럼요, 오빠 결혼식에 갔던 기억이 나는 걸요.”
내 말에 정말 기뻐하셨다.
60세가 훨씬 넘은 오빠가 또 말했다.
“또 온나!”
오랜만에 느껴봤던 힐링이었다. 엄마 산소가 있어 자주 들러야 할 아버지의 고향! 이번 설날, 친정나들이에서 나를 고모라고 불러주고, 기억해 준 모두가 벌써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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