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저널 창간 14주년 기획
상하이•화동지역 우리 역사를 찾아서 - 항일운동 발자취 ⑤ 항저우 임시정부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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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저우 임시정부 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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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저우 임시정부 기념관이 있는 창성루(长生路) |
1932년 홍커우공원 의거 이후,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는 고난의 대장정이 시작된다. 항저우로 옮긴 임시정부는 이 일대에서 1932년 5월부터 1935년 11월까지 3년 6개월간 항일 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당시 김구 선생은 자싱과 하이옌에 주로 은신해 있었으며, 임정 요인들은 일제의 밀정을 피해 항저우 곳곳을 숨어 지냈다.
항저우로 도착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철이 거주했던 칭타이(清泰) 제2여관(현, 췬잉호텔群英饭店 32호)에서 국무위원회를 개최하면서 이곳을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했다. 이후 1932년 6월에 국민정부의 주선으로 창성루(长生路) 57호 후빈촌(湖边村) 23호에 청사를 마련해 1934년 11월까지 사용했다.
그 후 우푸리(五福里) 2가 2호로 청사를 옮겼다. 또한 항저우와 함께 자싱지역도 임시정부의 활동거점 역할을 했다. 이는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이 중국 국민정부와의 교섭과 일제 정보망을 피해 전장과 자싱 등으로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항저우는 약 3년 6개월간 임시정부의 주된 활동지였으며, 임시정부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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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후빈촌 청사와 함께 거주하던 가족들이 1934년 우푸리 2호 건물로 이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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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푸리 2호 골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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棋星里(현재 齐心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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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빈촌 23호 옛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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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빈촌(湖边村) 옛모습 |
2007년 복원 지난해 재개관, ‘西湖’와 인접, 올해 1만명 다녀가
항저우 임시정부청사 기념관은 창성루 57호 후빈촌 23호에 복원됐다. 항저우시정부가 2002년 8월 중국 중앙정부의 승인을 얻은 후 거주민 이주 등을 거쳐 2005년 4월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해 2007년 11월 30일 개관식을 가졌다. 이 기간 후빈지역 상무 여유특색거리건걸지휘부와 저장대학교 한국연구소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또 지난해 12월에는 개관 5주년을 맞아 항저우시정부와 한국 독립기념관의 지원으로 보수공사를 거쳐 재개관을 하게 됐다.
항저우 임정청사는 대지 면적 211㎡, 연건평 423㎡ 규모의 2층 벽돌목조 건물로 1, 2층 모두 기념전시관으로 구성돼 있다. 또 항저우 관광명소인 서호(西湖)가 도보로 2~3분 거리에 위치해있고 인근에 대형 쇼핑센터와 음식점 등이 들어서 있어 관광객의 접근이 편리하다. 기념관 관리직원에 따르면 지난 국경절 연휴때 약 5600명이 다녀갔으며, 올해들어 약 1만여명의 관광객이 관람했다. 그러나 한국인 방문은 거의 없으며 대부분 중국인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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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 흉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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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기념관 입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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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기념관 주변 후빈촌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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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호텔과 음식점이 들어선 후빈촌 현재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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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저우시 역사건물로 지정된 후빈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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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기념관 안내표지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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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저우 임정 기념관의 한국관광객들 |
항저우 임정 기념관 복원 늦은 이유
항저우 임시정부청사를 비롯 김구 선생 피난처가 있는 자싱, 하이옌 등 모두 저장성에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저우 임시정부청사(2007년)는 자싱(2000년) 하이옌(1996년)에 비해 복원시기가 한참 늦다.
이에 대해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항저우 유적지 기념관 최란 부장은 “자싱과 하이옌은 김구 선생 차남인 김신(91세, 교통부장관, 공군참모총장 역임)이 당시 복원을 적극 추진했으나 항저우는 김구 선생이 거주했던 곳이 아닌데다 자싱, 하이옌과 가까워 저장성 내 기념관이 또 들어서는 것을 반기지 않아 상대적으로 소외됐다”고 밝혔다.
항저우 임시정부청사 기념관은 2007년 김구 선생 손자인 김양 상하이총영사 재임기간 항저우시정부의 적극적인 추진과 지원으로 복원됐다.
국무위원 김철·송병조·차리석... 그들의 독립정신이 깃든 곳
임시정부 항저우 시절 두번째 사무실로 사용됐던 현재 창성루 후빈촌 기념관은 김철(임시정부 국무위원) 송병조(임시정부 국무위원, 의정원의장, 임정회계원장) 차리석(임시정부 비서장, 국무위원)이 거주했던 곳이다. 이 세분은 모두 독립운동을 펼치다 중국에서 병사해 전시관을 둘러보는 내내 안타까움을 더했다.
특히 1934년 6월 29일 한국독립당 이사이며 임시정부 국무위원인 김철은 항저우 신민루(新民路) 광치병원(广济医院 현 저장의과대학 제2부속병원)에서 급성폐렴으로 사망해 후산탕 공동묘지(예수교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이후 유해봉안운동을 추진했으나 묘소를 찾지 못해 후손들이 후산탕 공동묘지 인근에서 김철선생 혼령을 위한 초혼제를 지냈다. 전남 함평군 출신의 김철 선생은 고향에 기념관과 김구 선생과 활동했던 ‘상하이임시정부청사’를 마당루 임정청사 모습 그대로 재현해 청소년 교육현장 학습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 평안북도 출신의 송병조와 차리석은 중국에서의 마지막 임시정부 거주지였던 충칭에서 광복을 바로 앞둔 1942년, 1945년 각각 숨을 거둬 임정요인들과 가족들의 비통함 속에 장례를 치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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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임시정부 기념관(창성리 후빈촌)에 거주했던 3명의 국무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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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 송병조 차리석 당시 임정 국무위원 3인 |
해체위기의 임정, 삼균주의 채택
임시정부를 항저우로 옮긴 뒤 임시정부는 해체위기까지 맞았다. 해체를 주장한 것은 1932년 11월 통일전선을 내걸고 좌우파의 독립우동단체들이 연합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과 그 세력이 주도해 1935년 7월 결성한 민족혁명당이었다. 7명의 국무위원 가운데 5명이 민족혁명당에 참여하며 임정을 사임했다. 이동 시기의 임시정부는 여전히 국무위원제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이로서 존폐의 위기에 놓이게 됐다.
이에 차리석과 송병조는 광둥(广东), 항저우(杭州), 자싱(嘉兴) 등지의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등을 찾아 다니며 임시정부의 재건과 구심점으로서의 임무를 강조, 마침내 다시 합류하게 하는 등 임시정부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35년 11월 13일 위기를 극복하고 임시정부를 지켜내 국무위원 취임식을 거행하게 됐다. 이때 주석에는 이동녕, 내무장 조완구, 외무장 김구, 재무장 송병조, 군무장 조성환(曺成煥), 법무장 이시영, 비서장에 차리석이 임명됐다. 이들은 또한 신당운동에 참가했던 ‘한국독립당’이 ‘민족혁명당’의 창립과 함께 해체되어 임시정부의 여당이 없어졌으므로 새로운 여당으로 ‘한국국민당’을 창립했다.
‘한국국민당’은 창립선언서에서 “자에 오등은 국가주권의 완전한 광복에서 전민적(全民的) 정치․경제․교육 균등의 3대 원칙의 신앙을 확립하고 (중략) 더욱 성실․건전․영용의 비개인적 정신으로써 (중략) 적의 총 세력을 박멸하고 완전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여 위로는 조선의 광휘를 빛내고 밑으로는 자손만대의 영예를 발전시킴으로써 세계 각국 민족과 함께 공존공영을 도할 것을 선언한다”라는 ‘삼균주의(三均主義)’에 입각한 민주공화국의 건설을 당의 기본이념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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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용했던 태극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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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무실 재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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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내빈들의 기념 서명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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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각지에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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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을 도운 저장인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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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선생을 도운 추풍청 선생은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항저우 유적지 기념관>
·주소: 杭州市长生路55号
(항저우기차역 택시요금 16~18元 이내)
·문의: 0571)8706-4310
·입장료: 무료
▷고수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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