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최근에 학교를 옮겼는데 옮겨 간 학교에서 만난 한국 아이가 자꾸 아들을 괴롭힌다는 내용이다. 국경절 연휴가 끝나면 화장실에서 보자 했단다. 그래 3학년인 아들이 학교 가기 싫다 했단다. 뭐 학교 불문, 국적 불문 어느 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 아닐까 하실 분도 있으시리라. 다행히 초등 3학년이니 여러 노력으로 그 지인도 이 일을 지혜롭게 잘 해결한 듯 하다.
북경에 있다 들어 간 선배가 한 명 있다. 중 3인 아들이 한국에 적응해 갈 때, 집에도 자주 놀러 오던 친한 아이가 정작 이 선배의 아이를 1년 동안 계속 괴롭혔단다. 다행히 아들이 참다 참다 엄마에게 말을 해 더 큰 일이 일어나는 걸 막을 수 있었다 한다. 걱정스런 맘에 신경정신과 의사를 찾았더니 엄마에게 이 일을 말한 피해 아들은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말과 함께 오히려 가해 학생이 치료, 상담을 받아볼 것을 권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그러면서 덧붙여 한 말이 지금도 귀에 아른거린다.
'확률이 99퍼센트의 일이어도 내 아이에게 일어나지 않으면 0퍼센트의 일이 되고, 확률 1퍼센트의 일도 내 아이에게 일어나면 그 순간 100퍼센트가 된다.'
본인 아들이 학교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순간 100퍼센트의 체감 온도는 말 안해도 추측 가능하리라 여겨진다.
작년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친구의 아들이 이 곳 상하이에서 학교 폭력의 피해자로 고통 받는 것을 지켜보았다. 초등학생이 아닌 아이들이었기에 피해 부모의 마음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내겐 고통이었다. 그것을 풀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답답함 또한 많이 느꼈다.
뉴스에서 보던 일이 현실로 되어 친구의 아이 또한 피해자임에도 그 시선들을 견디기 힘들어 전학을 선택했다. 정작 주도했다던 가해자 아이는 학교에 남고 실제적으로 폭력을 행사 했던 아이들만 전학 조치가 되었다 했다. 그런데 아이들은 폭력 못지 않게 가해 아이들이 무수히 내뱉었던 말들에 더 큰 마음의 폭력을 받았음을 보았다.
아이들이 사춘기를 지나는 청소년기가 되었다. 소위 ‘왕따, 찐따?’라 부르는 이상한 단어들을 써가며 질풍노도의 시기의 감성에 무수한 흠집이 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나는 이 단어들을 싫어한다. 며칠 전 뉴스를 통해 한 중학생에게 지속적으로 가해진 언어폭력이 법원에서 죄로 판결을 받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이 부르기 쉽게 ‘왕따’라 부르지만 이 말은 '집단 따돌림'이라는 단어다.
아무리 ‘왕따’라는 단어로 가볍게 넘기려 해도 이것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괴롭히는 죄에 해당하는 단어다. 그래서 나는 의도적으로 집단 따돌림이라는 단어를 쓴다. ‘찐따’라는 제대로 정의할 수 없는 단어를 써 가며 아이들을 비하하고 놀리는 이 모든 행위가 언어폭력이다.
물론 안다. 내 아이만 제대로 산다 해서 바로잡아지지 않는 세상이라는 것을. 그런데 어떤 아이가 그랬다. 아닌 줄 알면서도 잘못된 줄 알면서도 자신의 또래 집단에서 하는 말이 진리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고. 그래서 혼란스럽다고. 그래서 소심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나는 왕따 대신 집단 따돌림이라는 단어를 꼭 눌러서 말한다.
아이들이 놀리듯이 하는 말들이 언어폭력임을 선명하게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뭐가 변할까마는 아직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것이 죄인지도 모르는 아이들이 한 번만이라도 생각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혼자서라도 이 운동을 한다. 비록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은 모습일지라도 우리 아이들이 학교라는 사회에서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본다.
ⓒ 상하이방(http://www.shanghaibang.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