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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화동지역 우리 역사를 찾아서 - 항일운동 발자취 ④자싱(嘉兴) 김구 선생 피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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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 피난 노선도 |
상하이와 인근 지역 곳곳에는 우리 역사 유적지가 많다. 해외 사는 교민들과 우리 자녀들이 생생한 현장 교육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것이기도 하다. 뼈아픈 역사마저 감사할 일이다. 기차나 자가용으로 1~2시간 이동하면 저장성 항저우임시정부청사를 비롯 자싱(嘉兴)과 하이옌(海盐)의 김구 선생 피난처 등에서 당시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이곳에 가면 일제의 추격을 피해 쫓기던 임시정부 요인들의 나라 잃은 설움도 함께 느끼게 된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홍커우 공원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상하이를 떠나게 된다. 일제는 현상금 60만위안(현재 한화198억원 상당)을 걸고 주동자인 김구 선생을 잡아들이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항저우를 비롯 자싱, 하이옌 등 곳곳으로 은신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년 6개월간 항저우 시절을 맞이하게 된다.
이때 김구 선생은 상하이 항일구원회 회장 추풍청(褚辅成) 선생의 도움으로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을 자싱으로 피신했다. 김구 선생은 자싱에 피신하는 동안 자싱 시민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여러 차례 거주지를 옮겨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며 위기를 넘겼다. 자싱에 피신해 있는 기간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도자로서 자리매김하는 동시에 약화된 독립운동 세력을 정비했다. 자싱 시기는 한국독립 운동사에서 새로운 시작을 위한 도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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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싱 메이완지에 '김구 피난처' 입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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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장성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된 '김구 피난처' |
자싱 메이완지에(梅湾街)
자싱 메이완지에(梅湾街) 76호는 상하이를 떠난 김구 선생이 몸을 숨긴 곳이다. 이 곳은 추풍청의 수양아들 천통성(陈桐生) 소유의 2층 목조건물로 천통성 부부와 김구 선생 가족이 머물렀던 곳이다.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김구 선생이 이곳으로 피신할 무렵, 상하이대한민국임시정부도 이주를 시작했다. 이 때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근처에 있는 일휘교(日晖桥) 17호에 거주했다.
1932년 5월 하순, 추풍청은 김구 선생의 피신처를 이곳으로 옮기고 강변에 위치한 남쪽방에 머물게 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2층에 들어서면 침대와 책상이 놓인 김구 선생 침실을 볼 수 있다. 침대 옆에 비상탈출구를 만들어 위급한 일이 발생하면, 배를 타고 호수로 피신하곤 했다고 한다. 창문을 열면 한눈에 남호가 들어오고 아랫쪽에는 김구 선생이 위기에 탔을 것 같은 나룻배 한 척이 정박돼 있다.
메이완지에 김구 선생 피난처는 2006년 5월 저장성 성급 문물보호지역으로 지정된 후 2007년 8월 지아싱에 공장을 둔 효성그룹이 100만위안을 기부해 대대적인 보수 관리가 시작됐다. 5년이 지난 지금은 자싱시정부에서 직접 관리하고 있으며, 지난해부터 입장료를 받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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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 흉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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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완지에 김구 선생 피난처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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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선생 침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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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실에서 본 남호(南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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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실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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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실 내부의 가구 소품 |
임정요인 피신을 도운 褚辅成
김구 선생 피난처 옆에는 추풍청 선생의 사료진열관이 들어서 있다. 추풍청 선생은 1932년 5월 20일 신해혁명의 원로이며 저장성 국민당 정부주석 및 당시 상하이 항일구원회 회장과 상하이법학원 원장이었다. 그는 자신과 가족들의 생명 위험을 무릎쓰고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을 상하이로부터 자신의 고향인 자싱으로 긴급히 피난할 수 잇도록 지원해 주었다.
1996년 한국정부는 추풍청 선생이 김구 선생 등 한국독립운동 인사들을 도운 공훈을 헤아려 ‘대한민국건국훈장-독립장’ 수여했으며 같은해 9월 30일 자싱에서 성대한 수훈의식을 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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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청 선생 사료진열관 |
김구와 부부로 위장한 朱爱宝
1933년 여름, 재청별장에서 메이완지에로 돌아온 김구 선생의 신분이 자싱 동문에서 알려지자 추펑장(褚风章)과 천통셩은 처녀 뱃사공인 주아이바오(朱爱宝)에게 김구 선생의 안전과 생활을 책임지도록 부탁했다. 주아이바오는 자싱에서 광둥인 장진구로 위장한 김구를 안전하게 피신시키기 위해 낮에는 하루종일 배를 타고 운하를 돌며 일제 추격을 따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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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아이바오(朱爱宝) |
1936년 김구는 자싱을 떠나 전장(镇江)으로 왔는데 이 정보를 입수한 일제는 김구를 체포하기 위해 암살대를 파견했다. 김구는 스스로 신변의 안전을 확보할 수 없어 자싱에 있는 주아이바오를 전장으로 데려와 고물상 부부로 신분을 위장함으로써 진강에서의 어려운 피신생활에서 주아이보의 큰 도움을 받았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1936년 난징에서 주아이바오와 헤어질 때 ‘5년 가까이 그녀는 나를 광둥인으로만 알고 위했다. 나에 대한 공로가 작지 않은데 내가 뒷날을 기약할 수 있을 줄 알고 돈으로 넉넉히 돕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라고 회고했다.
<백범 김구 평전>의 중국 여류작가 샤녠성(夏辇生) 씨는 임정시절 김구선생 경호원의 유자녀인 형부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들을 평전과 소설로 집필했다. 그녀는 장편소설 <선월(船月)>에서 김구를 사모한 처녀뱃사공 주아이바오를 주인공으로 자싱 피난기를 묘사하기도 했다.
자싱 남호(南湖) 특별회의
남호는 경치가 아름다워 사계절 모두 사람들이 즐겨 찾는 저장서 3대 호수 중 하나다. 1935년 10월,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16명은 자싱 남호의 유람선상에서 특별회의를 개최하고 김구 선생 등을 새 국무위원으로 선임하는 등 제13기 임시정부 내각을 구성했다. 이 회의를 통해 일시적으로 침체에 빠졌던 임시정부가 재정비되고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 지도자의 위치를 확립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