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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화동지역 우리 역사를 찾아서 - 항일운동 발자취 ②육삼정 의거와 백정기 의사
일제 강점 하에 나라의 독립을 외치며 일제에 저항했던 ‘상하이 3대 의거’가 있다. 교민들에게 잘 알려진 홍커우공원의 윤봉길 의사 의거(1932), 일본 고위장군을 저격한 의열단의 황푸탄(黄浦滩) 의거(1922), 그리고 음식점 ‘육삼정’에서 주중일본공사를 폭살하려다 거사 직전 실패했던 육삼정 의거(1933) 등이다. 비록 미완의 거사지만 항일 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육삼정 의거는 윤봉길 의거, 이봉창 의거와 함께 ‘해외 3대 의거’로 꼽힌다.
육삼정 의거란
올해 80주년을 맞은 육삼정 의거는 1933년 3월 17일 홍커우구(虹口区)에 위치한 음식점 ‘육삼정(六三亭)’에서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와 중국국민당 친일파가 비밀 회동하는 현장에 폭탄을 투척하려 했던 거사다. 이날 일본공사가 중국정부 요인을 매수하기 위해 육삼정에서 연회를 개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남화한인청년연맹의 백정기, 원심창, 이강훈 등이 이를 처단하려고 했다. 이들은 육삼정에서 약 200m 떨어진 음식점 송강춘(松江春)에서 일본공사가 돌아가는 것을 처단하고자 기다리던 중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거사를 주도한 백정기 의사(1896∼1934)는 1933년 11월 나가사키 법정에서 사형구형에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고 이듬해 이사하야 감옥에서 모진 고문으로 옥중에서 순국했다. 백정기 의사의 유해는 윤봉길, 이봉창의사와 함께 1946년 국내로 봉환돼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원심창 의사(1906∼1973)는 거사 후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13년간 복역 중 1945년 해방 후에 풀려났다. 이후 재일거류민단을 만들어 재일동포 권익증진에 앞장섰다. 이강훈 의사(1903∼2003)는 1960년대 이후 혁신활동과 광복회장을 지내며 순국선열 정신 선양에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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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삼정 의거 현장으로 알려진 乍浦路190号 일대 |
육삼정 의거 전모 담긴 日 외무성 문서 발견
그간 회고와 증언만이 남아있던 육삼정 의거가 최근 발견된 일본 외무성 문서에 그 전모가 기록되어 화제다. 육삼정 의거에 대해 공식 문서가 나온 것은 처음이라 더욱 의미가 크다.
이번 문서를 찾는 데는 동북역사재단의 지원을 받은 백정기 의사 기념사업회(회장 유성엽 민주당 의원)의 노력이 큰 역할을 했다. 내년 백 의사의 순국 80주년을 맞는 기념사업회 측이 근대사를 추적해온 김광만 PD와 함께 적극적으로 자료 조사에 나섰다.
유성엽 회장은 지난 18일 본지와의 전화인터뷰를 통해 “이번에 발견된 문서는 모두 263쪽에 이르며 아주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사항들이 기록돼 있어 정확도가 높다”고 밝혔다. 유 회장은 또 “이 문서를 통해 육삼정 의거 노출이 내부 밀정에 의한 것으로 파악됐으며, 이미 백 의사를 비롯한 가담자들의 신상정보와 은신장소는 물론, 의거 실행 계획이나 도망 경로까지 지도로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고 전했다.
일제가 그린 지도에는 백정기, 이강훈이 폭탄 투척을 주도하고 원심창과 우당 이회영(1867∼1932)의 아들인 이규창(1913∼2005)이 망을 본 뒤 함께 도주하는 루트까지 세세하게 그려져 있다고 한다. 이는 일제가 얼마나 치밀한 수법으로 독립투사들을 잡아들이려 공을 들였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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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육삼정 위치로 추정되는 현재 芳香酒店 |
육삼정 의거의 의의와 성과
육삼정 의거는 흔히 실패한 거사로 인식돼 왔다. 가장 큰 목표였던 주중일본공사를 처단하지 못한 데다 관련자 대부분이 검거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된 문서로 육삼정 의거의 성과는 작지 않다”고 밝힌 유성엽 회장은 “1933년 11월 11일 동아일보에 ‘조선인을 중심으로 한 상해의 국제 흑(黑)테로단’으로 크게 소개되며 민족의 자긍심을 높였고, 육삼정에서 벌어진 일제와 중국국민당 친일파의 협잡도 세상에 알렸다”고 강조한다.
또한 육삼정 의거는 백범 김구를 비롯한 민족주의 세력이 적극 협력했던 거사라는 것에 의의가 깊다. 이 문서에서 백의사의 도시락 폭탄은 1932년 윤봉길 의사가 투척했던 것과 동일한 것을 입증했다. 백범이 비밀 제조업자에게 의뢰해 만든 도시락 형태의 폭탄 7개 가운데 하나를 윤 의사가 먼저 썼고, 나머지를 백범이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지도자 정화암(1896∼1981)에게 보냈는데 백 의사가 이것을 쓰려다 체포된 것이다.
육삼정 의거 현장은 어디?
신문과 인터넷 자료를 통해 확인된 육삼정 의거 현장은 와이탄에서 그리 머지 않은 홍커우구(虹口区) 자푸루(乍浦路) 190호로 알려져 있다. 현재 자푸루 190호 주소지의 건물은 없고, 우창루(武昌路)와 맞닿은 180호에 ‘팡샹주점(芳香酒店)’ 음식점이 자리하고 있다. 당시 육삼정의 주소지가 우창루였다는 근거를 토대로 보면 이 인근에 일본공사와 중국 국민당 친일파의 협잡이 이뤄진 육삼정이 자리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올해 3월 육삼정 의거 8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원심창 의사 기념사업회에서 상하이를 방문하면서 육삼정의 위치가 자푸루 190호가 아닌 이곳에서 150미터 떨어진 탕구루(塘沽路)라고 밝힌 바 있다. 1930년 이 건물이 일본 음식점이었다는 이곳 주민들의 증언이 있어, 육삼정 자리가 남아있는 것으로 최종 확인되면 앞으로 독립운동의 새로운 사적지로 보전 관리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육삼정 의거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것에 대해 백정기의사 기념사업회 유성엽 회장은 “상하이는 항일독립운동의 역사가 깃든 곳이다. 교민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분들의 희생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백 의사는 일생을 독립운동을 위해 바쳤던 큰 인물이나 상대적으로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앞으로 기념사업회에서 더욱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고수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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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삼정 인근 武昌路 |
六三亭의거 현장이 乍浦路가 아니라 부근의 塘沽路가 맞다는 의견이 최근 제기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