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으로서 독립운동가들을 항상 마음에 담고 살아야
김구 선생, 유관순 열사, 안중근 의사, 안창호 선생… 모두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이름들이다. 그들은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대한민국의 독립에 기여한 유명한 독립운동가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시간에 잠깐씩 언급되거나 아예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은 무시당하기 일쑤다. 오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꾸준히 활동해 온 대표적 위인들을 살펴보는 시간이 있었으면 한다.
이상재 선생
이상재 선생의 활약은 1896년에 시작되었다. 이 해 독립협회를 조직해 독립문을 건립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민중의식을 키우는등 국민계몽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독립협회의 부회장으로서 만민공동회를 열어 러시아의 내정 간섭과 이권 침탈을 논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유명한 사건인 네덜란드 헤이그에서의 만국편화회의 밀사 파견을 준비하다 일제의 통감부에 구속되는 사건도 있었다. 이상재 선생은3•1 운동을 하다 옥살이를 하고 조선교육회를 창립하는등의 꾸준하고 다사다난한 독립운동을 벌였다.
이승훈 선생
상인이었던 이승훈 선생은 자신의 운송선이 일본의 배와 충돌하여 가라앉자 일본에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당연히 일본은 이를 무시하다시피 넘겼고 이승훈 선생은 이 일을 계기로 외세와 민족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도산 안창호의 강연을 듣고 인생을 민족을 위해 바치겠다는 결심을 한 뒤,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였다. 또, 같은 해에 중등교육기관인 오산학교를 개교하여 교장이 되기도 하였다. 신민회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6년의 옥고를 치르고, 종교계 인사들과 학생층의 도움을 받아 3•1 운동을 계획하였다. 3•1운동의 영향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로 지목된 이승훈 선생은 감옥살이를 하다 풀려나 동아일보사의 사장을 맡고 물산장려운동을 추진하는 등의 지속적인 노력을 하였다.
김붕준 선생
김붕준 선생은 대일항쟁기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와 청년학우회에서 활동한 바 있으며, 안창호와 함께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창설했다. 그는 중학교에 입학한 후 서우학회 및 신민회와 청년학우회에 가입해 본격적으로 국권회복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서울에서 ∙1만세운동을 도하고 하이로 명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에 참여해 군무부 서기 및 참사, 교민단 총무 및 국무원 비서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1921년에는 안창호와 흥사단원 동위원부를 창설했다. 김붕준 선생은 임시정부기관지 ‘독립신문’의 경영을 맡아 ‘독립운동사’편찬에 관여한 것은 물론, 상해인성학교 교장에 취임해 독립정신을 고취했으며 독립 후에도 김구 선생과 한국독립당 간부로 활동하며 민족통일전선 구축운동을 계속했다.
Tip. 의사와 열사의 차이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졌을 법한 호칭의 차이. 왜 유관순 열사와 안중근 의사의 호칭은 다른 것일까?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열사를 ‘나라를 위해 절의를 굳게 지키며 충성을 다하여 싸운 사람’이라고 정의했고, 의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제몸을 바쳐 일하려는 뜻을 가진 의로운사람이라고 정의 내렸다. 이 설명으로는 쉽게 차이를 설명할 수 없는데, 말하자면 열사는 맨몸으로써 저항해 자신의 지조를 나타내는 사람이고, 의사는 무력(武力)으로 항거해 의롭게 죽은 사람이다.
예를 들면 유관순 열사는3∙1운동 당시에 일본군에게 잡혀 명예롭게 희생으로 독립의지를 알리고 ‘열사’라는 호칭을 얻었다. 안중근 의사는 권총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 했으므로 ‘의사’라는 호칭을 얻은 것이다. 비슷한 예로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도 무력의 일종이므로 ‘의사’라는 호칭을 받았다.
▷고등부 학생기자 김혜준(콩코디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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