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원의 상하이리포트]
"의형제가 된 기사아저씨"
가오 선생(高선생)은 나의 기사 아저씨였다. 2004년1월 중국말을 전혀 못하는 상태에서 상하이에 처음 왔을 때 나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던 사람. 지금은 중국 땅에서 내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의형제가 되었다.
그 당시 가오 선생은, 말을 많이 하지 않고, 내 분위기를 살펴 알아서 처신하는 현명한 기사였다. 알고 보니, 그는 조그만 렌터카 회사의 사장이었고, 총 3대의 차량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한 상태였다. 그 전에는 택시를 몰았다고 한다. 호구는 상해이지만, 출생지는 산동지방이라 그런지 잔 정이 있었다. 내가 심신이 지쳐있을 때는 중국가요, ‘월량대표아적심’와 ‘첨밀밀’을 일부러 자주 틀어 주었다.
2004년 다음 대표처 시절 거의 막바지에, 하루는 고선생이 술을 한 잔 하자고 했다. 그렇게 술잔을 기울이다 보니, “회사가 잘못된 것이, 모두 사장님 잘못이 아니니 자책하지 말고 마음을 편히 하세요. 중국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저를 찾으세요. 내가 해결 못하면, 건너건너 �시까지 동원해 내가 반드시 해결해 줄 테니까요.” 말만이라도 고마웠다. 그 후로, 실제로 수 차례 어려운 상황에서 고선생의 도움을 받게 된다. 막막한 중국 땅에서 산전수전 겪다 보면 정말 현지인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사소한 집 문제부터 중국에서나 발생하는 독특한 문제까지, 때마다 나는 늘 고선생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늘 얘기한다. 자신이 나로부터 더 큰 도움을 받았다고. 그게 무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도운 거라고는, 1년 정도 차량을 렌트하고, 가끔 저녁 값을 챙겨주고, 렌터카 회사의 서비스 마인드를 얘기해 준 게 다였던 거 같은데.
고선생은 배운 사람이 아니다. 흔히 얘기하는 고졸이다. 고선생은 인격 자체가 남달랐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젊었을 때 술도 좀 먹고 놀았다고 스스로를 폄하하는데, 그런 분위기가 잘 안 느껴진다. 미국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있는 과 친구도 상해를 방문했다가 가장 인상 깊게 느낀 게 고선생이었다고, 아직도 얘기할 정도다.
8년이 지난 지금, 만에 하나 내가 중국인의 명의를 빌려 사업을 해야 한다면, 그러다가 혹시라도 사업을 빼앗길 수도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고선생의 이름을 빌릴 것이다. 아무 대가나 질문 없이 나를 도와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지금 나는 그를 ‘형’이라고 부른다. 그 역시 나에게 ‘동생’이라고 부른다.
“갑부가 된 친구 왕웨이”
2004년 무더운 여름, 약간 허름한 건물에 입주해 있는 한 쇼핑몰 회사를 찾아갔다. 독일의 베텔스만 그룹에서 투자한 BOL(베텔스만온라인 북클럽)이라는 회사였다. 다음에서 중국 진출 후 인수할 중국 기업을 찾고 있었고 BOL 또한 후보였다.
눈빛부터 남다른 젊은 지사장이 나왔다. 자신을 Gary라고 소개했다. 그 당시 베텔스만 온라인은 적자 상태였고, 매각을 원하고 있었다. 회사에서의 첫 만남 이후 게리와 나는 자주 1:1 만남을 가졌다. 그러다 보니, 사적인 만남으로 이어졌고, 게리의 여자친구와 나의 와이프와 2:2로 근사한 프랑스 식당에서 식사를 하기도 했다.
게리와 결정적으로 친해지게 된 동기는, 그가 매우 솔직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비즈니스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인수를 위한 실사 과정에서 내가 자꾸 의문을 제기하자, ‘솔직히 자신이 보기에도 회사가 건강하지 않으니 인수를 안 해도 좋다’는 말을 했다. 상해 시내의 오래된 아이리쉬 바에서 게리는 나에게 제안을 했다. “우리 열심히 살자. 지금부터 15년 후 바로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 서로가 멋진 모습으로 무언가를 이루었기를 바래.”
그리고 얼마 후 게리는 BOL을 그만두게 된다. 그만두기 전, 자주 본사에 대한 불만을 얘기했었는데, 아무래도 큰 갈등이 있어 보였다. 그게 오늘날 왕웨이(나스닥에 상장한 중국 최대 동영상사이트의 CEO)가 있게 한 계기가 될 줄이야. 인생사는 정말 새옹지마인 거 같다.
어느 순간, 게리가 신문과 방송 미디어를 장식하고 있었다. 게리는 분명히 나에게 스스로 낯을 가리는 게 문제라고 했었는데, 내가 보기엔 그는 언론을 충분히 이용하고 있었고 스스로 조명 받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기사 스토리는, ‘중국의 최초 동영상사이트로 새로운 미디어의 장을 열다’라는 컨셉 이었다. 어떤 때는, CCTV를 동반하고 중국의 서부 고산지대(샹그릴라) 하이킹을 시도하기도 했다.
2010년에 한국에서 다시 상해로 다시 돌아왔을 때, 점심 식사를 함께 했다. 그가 일하는 회사에 딸린 식당에서였다. 점심 후, 1시에도 미팅이 잡혀 있어서 딱 1시간이 빈다고 했다. 이미 그는 중국 인터넷계의 거물이 되어 있었고, 당당한 포스가 아우라를 이루고 있었다. 그 후, 언론을 통해 그가 이혼을 하고 나스닥 상장에도 실패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안타까웠다.
하지만 두 번째 도전에 투도우는 나스닥 상장에 성공하게 된다. 이혼한 게리의 전 처가 상당 지분을 빼앗아 갈 거란 보도도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 게리가 투도우를 요우쿠(Youku)라는 경쟁사에 매각을 하게 된다.
얼마 전 북경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매각 절차가 진행 중이라 아직 북경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대낮부터 낮 술을 하자더니, 일본식 정종 큰 병을 주문했다. 옛날 얘기를 하고, 그저 친구끼리 개인 얘기를 하자니 너무 좋았다. 40대를 맞아 무엇을 고민하고 무슨 철학으로 살아갈 지에 대해 상호간의 공감대가 있었다. 절반 남은 병을 들고 나온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라 있었다. “엘리엇, 이거 챙겨가서 니가 마셔!”
그와의 인연, 언제까지 어떻게 이어질까? 나 역시도 궁금하다.
“하루 저녁 술자리에서도 친구는 된다”
중국에 온 후 많은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과의 교제에 대해 고민을 한다. 펑요(친구)가 되어야 비즈니스도 된다는데, 그러다 보니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술에 의존하게 되기 쉽다. 술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 금새 친해지고 그날 바로 친구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친구가 된 걸까? 중국에서 친구라는 말처럼 흔한 말도 없는 거 같다. 12살 띠동갑도 친구고, 남녀 사이에도 친구다. 사랑과 우정 사이를 고민 안 해도 된다. 술자리에서 적어도 딱딱한 아이스 브레이킹은 한 게 맞다. 하지만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서로의 아픈 곳까지 감쌀 수 있는 진정한 벗이 된 것은 결코 아니다. 아마도 피상적인 서로의 모습과, 피상적인 상대 회사에 대한 기대치로 쉽게 친구라는 말을 입에 올렸을 가능성이 많다. 대부분의 경우 그냥 숙취와 함께 기억에서 사라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몇 년을 묵어야 진정한 친구라 할 수 있을까? 햇수가 중요한 건 아닌 거 같다. 1년 만에도 더 없는 친구가 될 수 있고, 10년이 지나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서로를 위하는 마음인 거 같다. 친구 만들기는 국적과 큰 관계는 없는 거 같다.?
“진심으로 다가가기”
아직도 난 중국인 친구를 속속들이 알지는 못한다. 그나마 오랜 시간 알아온 친구를 좀 더 이해하는 것 같고, 실제 비즈니스로 엮인 친구는 제한적인데, 그게 차라리 다행인 거 같다. EMBA에서 만난 중국인 친구들과는 특별히 친한 편인데, 함께 골프도 치고, 그들 모두가 안정적인 포지셔닝을 하고 있어서인지 여유가 있어서 좋다.?
중국인 친구를 대할 때 솔직히 좀 더 희생정신은 필요한 거 같다. 문화적 차이로 인해 다소 개인주의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총무 역할을 해 주고, 내가 좀 더 희생하면 상대도 태도가 달라진다. 중국에서는 더치 페이가 일반적인데(특히 상해 이남 지역에서는), 내가 대접하면 상대도 대접하게 되고, 내가 먼저 뭔가를 배려하면 상대가 언젠가는 더 크게 되갚는 걸 아주 많이 경험했다.
진심으로 다가갈 때 상대의 마음이 열리는 건 국경을 초월한 공식인 거 같다. 내가 상대방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어 주는 것, 그것이 내가 중국인에게 다가가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