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탐방 주제는 유명인의 집에 방문하는 것이다. 장소를 정하던 중 영화배우의 집이라는 장소가 내 눈에 띄었다. 바로 마음을 정하고 친구와 함께 화산루(华山路) 978번지로 향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다. 화산루에 오니 주위에 유럽풍의 동화에서 나올 것만 같은 멋지고 아름다운 주택들과 건물들이 많이 있었다. 택시기사 아저씨에게 혹시 바이양이라는 배우를 아시냐고 여쭤 보니 잘 모르시겠다고 하신다. 유명한 배우가 아닌가 조금은 실망을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들뜬 마음으로 주위를 구경하고 있었다.
교통대를 지나 조금 더 가니 978번지에 도착했다. 하얀 현대식의 건물이었다. 차 안에서 구경했던 유럽풍의 주택이 아니라 특이한 디자인의 주택이었다. 역시 배우의 집이라 그런지 눈에 확 띄었다. 근처의 건물들도 사람들이 사는 주택이라기 보다는 은행, 경찰청, 대사관 같은 곳 이었다. 하지만 대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문 앞에 배달된 신문일자를 보니 오늘 배달된 신문이었다. 사람이 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초인종을 눌러 보아도 대답이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맞은편 식당에 들어가 건너편의 집에 사람이 사냐고 물어 보니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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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루의 풍경 |
중국어 선생님께 ‘바이양’ 이라는 배우가 중국에서 유명한 배우냐고 여쭤보았다. 선생님께서는 바이양은 당신의 어머니 세대의 배우라며 굉장히 유명한 배우였지만 젊은 층들은 잘 모를 거라 했다. 주로 어머니 역할을 많이 연기했으며 중국의 4대 여배우 중 한 명 이라고 했다. 또, 연기뿐만 아니라 평소 생활모습도 바르고 모범이 되어 많은 사랑을 받는 배우라고 했다. 바이양에 대하여 좀 더 찾아보았다.
바이양(白杨)의 본명은 양청팡(杨成芳)이며 중국의 저명한 영화배우라고 한다. 그녀는 1920년 4월 22일 베이핑(北平 현재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당시 중국 부모들에게는 전통적으로 남자를 중시하고 여자를 경시하는 사상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어린시절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린시절 보모와 함께 농촌에서 생활했다. 바이양이 11살이 되던 해, 그녀는 린엔화잉이에(联华影业)라는 베이핑에 있는 연기교습소에 가입하게 된다. 그녀는 연기교습소에서 성실하고 열성적으로 연기를 배웠고, 발전속도가 빨라 작은 배역들을 맡아 연기 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34년, 바이양은 중국여행극단(中国旅行剧团)과 중국무대협회(中国舞台协会)라는 극단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연기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녀는 ‘새벽이 밝아올 즈음(黎明之前)’, ‘차화녀(茶花女)’에 출연하여 그녀의 재능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 시절 중국은 전쟁에 처해 있었고 사회는 동요하고 있었다. 바이양과 다른 배우들은 민간백성들을 위하여 일본에 대항하고 나라를 구하는 내용의 연극을 자주 했다.
그녀는 충칭(重庆)과 청두(成都)와 같은 큰 도시를 다니며 연극을 했다. 그녀가 출연한 연극으로는 ‘굴원(屈原)’, ‘부활(复活)’ 등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으며 당시 중국 연극계의 샛별로 평가 받았다.
그녀는 1949년 새로운 중국정부가 성립된 후에도 끊임 없이 활동했고, 각종 다양한 아름다운 여성상을 만들어 내며 중국내외로 호평을 받았다.
바이양의 일생이 고난에서 휘황찬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발전하기 위해 열성적으로 노력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눈에는 그녀가 연기했던 배역들뿐만 아니라 평소의 바이양의 모습까지도 아름답고 친근하게 비춰졌다. 그녀는 중국영화계에 유명한 큰 업적을 일궈낸 연기 예술가이다. 그리고 1996년 세상을 떠났다.
중국의 암울한 시절 자신의 재능으로 국민의 힘이 되어준 바이양, 그녀를 중국의 국민 어머니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白杨故居:徐汇区华山路978号
▷고등부 학생기자 고애리(상해한국학교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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