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덕 칼럼]
레드 위엔이 그린 달러 밀어낸다
제조업에서 힘 키운 중국
‘1979년엔 자본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었다(只有資本主義才能救中國). 2009년엔 중국만이 자본주의를 구할 수 있었다(只有中國才能救資本主義)’. 중국에서 유행하는 말이다. 30여 년 전의 중국 개혁•개방이 서방의 자본주의 도움을 받았지만 현재 세계경제는 중국 덕에 먹고산다는 이야기다. 중국은 이제 맘에 들지 않는 서방의 경제 스탠더드에 대해선 ‘뿌(不•NO)’라고도 말한다.
이 같은 ‘경제 패권’ 선언의 힘은 뭐니 뭐니 해도 제조업이다. 이번 세계 금융위기에서 중국과 독일이 버틸 수 있었던 건 제조업이 받쳐줬기 때문이다. 미국 일각에선 아직도 ‘중국은 기껏해야 휴대전화 껍데기나 만드는 나라’란 비아냥이 나온다. 그러나 중국의 산업체질은 예전의 ‘하청 공장’ 수준을 넘는다. 그동안 추진한 자주창신(自主創新•독립기술 개발) 전략에 힘입어 하청 공장에 두뇌까지 갖춰지고 있는 것이다.
사례는 많다. 흔히 중국에 대해 ‘셔츠 1억 장 만들어 보잉기 한 대를 사가는 나라’라고 표현한다. 1달러에 수출하는 셔츠 1억 장을 죽어라 만들어봤자 한 대에 약 1억 달러 하는 보잉기 한 대를 사면 끝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주하이(珠海)에어쇼에 등장한 중국의 첫 민간항공기인 C919는 이 구조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은 ‘이 항공기가 독자 개발한 엔진을 사용했고, 항법장치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국산 기술로 만들었다’고 밝혔다.
중국의 금융굴기 시대로
세계 최대 제조업 국가 중국은 이제 제조업으로만 만족하지 않는다. 세계 금융을 재편해야 한다고 달려든다. 2008년 가을 터진 뉴욕발 금융위기가 결정적 계기였다.
세계 최대의 미국채권 보유국인 중국은 미국 정부의 ‘달러 찍어내기’에 넌더리를 쳤다. 그래서 나온 게 위엔(元)화 국제화다. 저우샤오촨(周小川) 인민은행장은 달러 기축통화에 정면으로 ‘노(NO)’라고 말했다. 위엔화 무역 결제에서 시작된 위엔화 국제화 작업은 착실히 진행 중이다. 지난해 6~11월 위엔화 결제 규모는 3400억 달러로 늘어났다. 1년 반 전만 하더라도 전무했던 수치다. HSBC는 3~5년 안에 중국의 한 해 무역거래(현재 약 2조 달러) 중 절반 이상이 런민삐(人民幣)로 거래될 것으로 예상했다. 달러와 유로에 이은 제3대 결제통화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위엔화 국제화의 척도는 외국 중앙은행이나 기업•금융기관이 얼마나 위엔화를 선호하느냐에 달렸다. 말레이시아는 지난해 9월 위엔화 표시 채권을 매입, 위엔화를 외환 보유 구성 화폐의 하나로 선택했다. 미국 중장비업체인 캐터필라는 지난달 홍콩에서 10억 위엔(약 1억5000만 달러)의 위엔화 표시 채권(일명 딤섬본드)을 발행했다. 맥도날드에 이어 두 번째다. 이치훈 국제금융센터연구위원은 "딤섬본드가 향후 5년 안에 아시아 지역에서 양키본드 시장을 누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같은 현상을 관통하고 있는 논리는 ‘훙삐(紅幣•Redback•위엔화)’와 ‘뤼삐(綠幣•Greenback•달러)’의 대결이다. ‘훙삐’가 세계 금융위기 이후 흔들리고 있는 ‘뤼삐’를 공격하는 양상이다. ‘훙삐’의 위력은 중국의 제조업 위상과 맞물려 ‘뤼삐’에 거대한 위협이 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시작된 일이다. 2001년 9•11 사태 이후 미국이 중동에 발이 묶여 있는 사이 중국은 부지런히 아프리카를 드나들며 자원 포식에 나섰다. 정부가 사냥감(자원)을 정하면 국유기업이 달려가 물어오는 식이다. 이제 ‘훙삐’의 공격은 미국의 코밑 중남미를 겨냥한다. 브라질•베네수엘라 등을 돌며 자원을 사들이고 있다. 중국은 지난 한 해 약 150억 달러를 이 지역에 투자했다. 미국 등 서방은 속수무책이다. “세계경제는 느리지만 아주 확실하게(Slowly but surely) 그린 달러 시대에서 레드 위엔 시대로 이동하고 있다.” HSBC 이코노미스트 취훙빈의 말이다.
글로벌 성장 기여율 40%
“위엔화 환율이 불안정해져 중국경제에 문제가 생기면 세계경제엔 재난이 닥칠 것이다.” 원자바오(溫家寶•온가보) 총리가 지난해 10월 브뤼셀에서 행한 연설의 한 대목이다. 미국의 위엔(元)화 평가절상 압박에 대한 대응이었다. 듣기에 따라선 세계경제에 대한 협박으로도 받아들여진다. 중국경제는 과연 세계경제를 ‘볼모’로 잡을 정도로 위협적 존재인가? 수치로 보자면 ‘그렇다’. 세계경제 성장에 대한 중국의 기여율은 2008년 23%, 2009년엔 40% 안팎에 이르렀다. 중국이 세계의 성장 엔진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스코틀랜드왕립은행(RBS)의 경제학자 벤 심펜도퍼(Ben Simpfendorfer)는 “세계경제에 새로운 패턴의 성장 주기가 시작됐다”고 말한다. ‘차이나 사이클’(중국이 주도하는 성장 주기) 시대가 열렸다는 해석이다.
‘차이나 사이클’의 시작은 1990년대 동아시아에서 시작됐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등장하면서 일본•한국•대만 등 인접국들은 그 공장에 부품을 공급하는 부품기지 역할을 했다. 고부가 부품 생산은 일본•한국 등이 맡고, 조립은 노동력이 풍부한 중국이 담당하는 분업 구조다.
이웃 국가의 중국경제 의존도는 높아졌다. 중국은 2003년 한국의 최대 수출 대상국이 된 데 이어 2005년에는 일본의 최대 수출국이 됐다. 중국이 기침을 하면 인접국들은 독감에 걸리는 구조다. 중국은 2000년대 들어 아프리카에 공을 들였다. 자원 확보가 목표였다. 자원외교는 중앙아시아•호주•중동 등으로 확장됐다. 이들 지역에 막대한 ‘차이나 머니’가 뿌려지면서 자원 부국은 경제호황을 누렸다. 미국의 앞마당 중남미도 타깃이다.
중국은 2009년 미국을 제치고 브라질의 최대 교역 대상국에 올랐다. 지난해 상반기 브라질의 경제성장률은 8.9%. 현지 언론들은 ‘중국이 만든 성장’이라는 데 이견을 달지 않는다. 자원 부국 역시 ‘차이나 사이클’을 타게 된 것이다. 심지어 미국의 우방인 유럽연합(EU)도 중국 영향권에 편입되고 있다. 중국이 그리스•포르투갈 등 재정위기에 빠진 나라의 국채를 사주기로 한 것이다.
다국적기업 역시 중국 시장에 목을 매야 하는 실정이다. 중국이 ‘세계의 백화점’으로 부상하면서 이 시장은 다국적기업의 명운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곳으로 등장했다. 중국 경제의 움직임에 많은 나라와 기업이 웃고 운다. 세계경제가 중국을 축(軸)으로 움직이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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