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徐)씨 집안 사람들이 모여 있다.’라는 뜻의 특이한 지명인 쉬자후이(徐家汇)는 오늘날 상하이의 번화한상업지구이자 우수 대학들이 밀집해 있는 교육중심구이다.
또한 이 곳은 상하이 천주교의 본거지로서 동•서양의 문화가 자연스레 녹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의 쉬자후이가 만들어지기까지 그 중심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명왕조의 대학자 쉬광치(徐光启)다.
쉬광치는 중국 명나라 후기의 정치가이자 학자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수학, 천문학, 농학, 군사학에 정통했던 팔방미인이었으며, 누구보다 서양 문물 전파에 힘썼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1562년 상하이 쉬자후이에서 태어나고, 사후(死後)에는 가족에 의해 이 곳에 묻혔다.
쉬자후이라는 지명도 그가 사망한 뒤, 그의 자손들이 이 곳에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붙여지게 되었다.
쉬자후이의 번잡한 도로와 고층 빌딩 사이에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광치공원(光启公園)이 있다.
실록으로 가득 찬 공원 안에는 쉬광치의 기념관과 묘가 위치해 있다.
공원 안을 들어서자마자 쉬광치를 기리는 아치 길과 하얀 십자가상이 우뚝 서 있는 그의 무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곳을 처음 찾는 사람들의 눈에 17세기 학자의 무덤 앞에 있는 십자가상이 언뜻 어울리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본래 쉬광치는 상하이 시민으로서는 최초로 천주교로 개종한 크리스천이다.
그는 생전에 손수 선교사를 초대하여 성당을 짓게 할 정도로 포교에 앞장섰다.
게다가 쉬광치가 사망한 후에도 그의 뜻은 자손 대대로 전해져 쉬자후이는 상하이 천주교의 발원지가 되었다.
이는 100년 넘게 쉬자후이를 지키고 있는 상하이 최초의 서양식 성당 쉬자후이톈주자오탕(徐家汇天主敎堂)이 잘 보여주고 있다.
묘를 지나 기념관으로 향하는 길에는 밤하늘을 관찰하는 쉬광치의 동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종종 밤하늘을 관찰하는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생전에 천문학에 능했던 그를 기리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쉬광치가 만든 달력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천문학적 지식이 총 망라되어 있는 대작으로 현대 중국 달력의 기초가 되었다.
쉬광치 기념관 안에는 그의 생애와 업적을 돌아볼 수 있는 사진과 자료들이 가득하다.
가장 먼저 들어서게 되는 전시관은 쉬광치의 전 생애를 엿볼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전시관 안에는 쉬광치의 유년 시절과 그의 부인인 우씨의 초상화를 비롯 자필 편지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전시물 하나하나 마다 자세한 설명이 쓰여 있어, 그의 생애를 더욱 실감나게 느낄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진열된 전시물을 따라 거닐다 보면 쉬광치의 삶에서 빠트릴 수 없는 학문적 동료인 마테오 리치와의 교류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관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국 학자들 사이에서 ‘동방의 유교 학자’로 불리던 마테오 리치는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에서 최초로 선교활동을 시작한 인물이다.
당시 마테오 리치는 포교를 위해 서양의 책들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었는데, 1583년 난징(南京)에서 만난 두 사람은 이내 뜻을 같이하여 서양 학술저서들을 함께 번역하기에 이른다.
이 때 두 사람은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함께 번역하여 《기하학 원본(几何学原本)》 전 6권을 간행하였다.
이 책은 후에 현대 중국 과학기술의 기초가 되는데, 기념관에서 꼭 놓쳐서는 안될 전시물 가운데 하나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쉬광치는 수학을 비롯하여 천문학, 농업학, 군사학에도 많은 저서들을 남겼는데, 전시관 곳곳에 그의 저서들이 그림들과 함께 소개되어 관람객들의 이해를 도와준다.
특히 전시물 중에는 쉬광치가 톈진(天津)에서 머물며 집필한 중국 농서의 집대성인《농정전서(農政全書) 》(60권)도 있다.
이 저서는 엄청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상세한 그림까지 첨부되어 있어, 학문에 대한 그의 열정과 가난한 농민들을 위하는 따뜻한 마음을 절로 느끼게끔 해 준다.
▷ 이혜민 인턴기자
▶위치: 南丹路17号
▶입장료: 무료
▶개방시간: 9:00~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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