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덕 칼럼]
조선의 마르코폴로에게 중국연구의 길을 묻다
<이 칼럼은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한우덕 기자의 블로그에서 옮긴 글입니다. 그는 지난 2003-2006년 상하이 특파원으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블로그 사이트(blog.joins.com/woodyhan)에 가시면 더 많은 칼럼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1488년 서해 흑산도 해상.
배 한 척이 거친 파도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집채만한 파도가 밀려와 배 옆구리를 쳤습니다. 돛대가 부러졌고, 배는 중심을 잃고 파도에 흔들렸습니다. 40여명 배 사람들은 나뒹굴었지요. 그들은 사투를 벌이고 있었던 겁니다.
폭풍이 지나갔습니다.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했습니다. 일엽편주(一叶片舟), 배는 고요한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죽음과의 싸움에 파김치가 됐던 그들은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바람과 해류에 자신의 운명을 걸어야 했습니다. ‘이 망망대해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들은 바로 옆에 와 있는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며칠을 고립무원 배 위에서 보냈을까, 희미한 물체가 수평선 너머에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육지였지요.
‘살았다!’ 배 사람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생환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곳이 바로 닝뽀(寧波)였습니다.
부러진 돛대를 원망하며 표류하던 사람들 중에 최부(崔溥•1454∼1504)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사대부였지요. 그는 왕(성종)명을 받아 제주지역 추쇄경차관(특명대신)으로 일하던 중 부친상을 소식을 듣고 고향 나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최부가 제주를 떠난 것은 1488년 1월 3일. 그는 13일간 표류 끝에 16일 닝뽀 해안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상륙을 하지 못하고 저장성 타이저우(台州)에서 가까운 산먼(三门) 해안에 도착합니다. 타이저우 해안에는 지금도 최부의 상륙을 기리는 작은(그의 활동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초라한)기념비가 놓여있습니다.
지금 최부를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중국에 체류하면서 보여준 ‘왕성한 중국 탐구’에 있습니다.
최부는 정확히 1백36일 동안 중국에 머물게 됩니다. 그는 타이저우(颱州)에서 항저우(杭州)로 이동, 대운하를 탑니다. 양저우(揚州), 쉬저우(徐州), 텐진(天津) 등을 거쳐 베이징(北京)에 도착하지요. 중국대륙 동부를 종단한 겁니다. 그리고는 산하이관(山海关)을 넘어 선양(沉阳)을 지나 압록강을 넘습니다. 조선시대 많은 중국 방문객과는 반대 방향으로 중국을 여행했습니다.
최부의 중국 행은 단순한 여행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행하며 목격한 것을 꼼꼼히 기록했고, 이를 정리해 ‘표해록(漂海錄)’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어떤 책이었을까요.
베이징대학 거전쟈(葛振家)교수는 ‘표해록 전문가’입니다. 그는 최부를 마르코폴로보다 더 뛰어난 중국 탐구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표해록의 학술가치와 사료가치는 세상에 잘 알려진 두 중국 여행기인 ‘동방견문록’(마르코폴로)과 ‘입당구법순례행기’(일본 엔닌(圓仁)스님)에 비견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표해록 광범한 문화적 함축성, 각 분야를 망라한 풍부한 내용, 사료적 가치, 중국에 대한 인식도 등은 두 저서를 능가한다. 표해록은 대운하의 치수(治修)방법, 운송, 연안 상업도시 등에 관한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최부는 성균관에 있으면서 ‘동국통감’ 저술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정도로 중국 이해가 높았습니다. 그의 중국이해가 여행기에 그대로 농축, 서양인이 볼 수 없는 중국을 기술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최부는 비록 구사일생으로 이국 땅에 왔지만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상륙 후 기진맥진한 상태였지만 부하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나라는 원래 예의지국이다. 비록 상(丧)중에 표류되어 군색하고 당황 중이라 하더라도 예의와 위엄을 보여 이 지방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나라의 예절을 알도록 해야 한다.”(표해록 권1, 1월 17일)
그는 당당했습니다. 죽음을 당할 수 있었던 처지였음에도 틀린 것은 틀리다 했습니다. 부당한 것에는 강력하게 항의했습니다.
“우리와 같은 타국인에 대해서도 법을 가지고 처리해야할 것이다. 더욱이 우리 군인들은 타국에서 언어와 습관이 불통하여 실로 萌芽와 같은데 비록 실수가 좀 있다 하더라도 가련하게 여겨 타이를 일이지, 도리어 때려서 상처를 입게 하는 행동은 우리를 호송하는 관인으로 도리가 아니다.”(표해록 권2, 2월 24일)
최부는 효(孝)를 최고의 가치로 숭상하던 조선의 사대부였습니다. 그 행동은 중국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그는 중국에서의 생활 내내 상복을 입었습니다. 명 황제를 만날 때에도 상복을 입겠다고 고집할 정도였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고리타분한 서생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경국치세(经国治世)철학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았습니다. 중국 강남을 직접 가본 첫 조선인이었던 그는 강한 역사적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여행 중 4명의 부하들로 하여금 매일 기록을 남기게 했습니다.
중국의 수차(水車)가 조선에 전해진 것은 그의 공이었습니다. 중국 남부지역 농부가 사용했던 수차는 힘이 적게 들고, 물을 많이 끌어올릴 수가 있어 조선에 유익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표해록에서 수차의 형태, 제조법, 재료, 사용법까지도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최부는 귀국 후 남부지방 가뭄의 피해가 크자 왕명으로 내려가 수차의 제조방법과 운용방법을 농민에게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한반도와 물길이 닿았던 저장성 닝뽀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당당하게 중국을 대했던 한 선배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경국치세 철학으로 조국의 발전에 보탬이 될 것이 무엇인지를 항상 찾았습니다.
최부가 보여준 당당함과 뜨거운 조국 사랑은 5백년 후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 땅의 젊은이들이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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