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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쌤 교육칼럼] 길치의 여행

[2023-03-20, 14:33:58] 상하이저널
나는 길치다. 한 번 가본 길은 당연히 잘 못 찾는다. 운전대를 잡고부터는 좀 나아지기는 했으나  자주 오가는 길도 머리속에 잘 안 들어온다. 동생네 사는 동네까지 40분 운전해서 갔는데 동생집 부근에서 한 시간을 헤맨 적도 있고, 어머니랑 길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전화로 말씀하시는 곳을 발견하지 못해 눈물을 머금고 그냥 돌아선 적도 있었다. 

지금이야 네비게이션이 잘 되어 있으니 주소만 찍으면 알아서 안내해주지만, 그런 서비스가 없던 시절에는 믿을 만하지 못한 나의 기억보다는 이정표에 의존하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면 먼 길로 돌아가기 일쑤다. 그래도 “모든 길은 통한다”라는 신념으로 일단은 시동부터 걸고 길 떠나는 데 주저함은 없었던 것 같다. 

20년 전 요맘 때였을까? 남편은 혼자 중국에 와 있고 아이들과 셋이서 휴일을 맞게 된 나는 그날도 호기롭게 아이들을 카렌스 뒤에 태우고 집을 나섰다. 자동차로 제주도와 강원도를 제외한 모든 도의 경계를 넘나드는 장거리 여행을 떠난 것이다. 전주를 거쳐 해남까지, 남해안 고속도로를 경유해 경주까지, 다시 안동 하회마을을 둘러서 돌아오는 코스였다. 

친정에서 집어 온 신간 지도책(역시 딸년은 도둑X이다)으로 나름 연구를 해서 루트를 짰는데 아직 도로가 덜 만들어져 길이 연결이 안 되어 있기도 하고, 심지어 다리가 낡아 폐쇄되어 돌아 나온 경우도 있었다. 제일 난감한 것은 가스충전소가 많지 않은 데다가 지도에 표시가 잘 안 되어 있어서 예정에 없던 도시를 찾아 헤매야 하는 경우였다. 요즘 같은 스마트폰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광경이리라. 그래도 예의 그 “노 빠꾸” 정신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가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미련했다.

그래도 그 여행을 떠올리면 잊지 못할 장면들이 많다. 이를테면 군산을 지나 김제평야를 달려가는데 저 멀리 먹구름 한 덩어리가 거대한 군함처럼 다가와 소나기를 쏟아내던 장면은 정말 장관이었다. 먹구름이 차 바로 위를 지나갈 때는 와이퍼를 격렬하게 작동시켜도 한 치 앞도 안 보이더니만, 먹구름이 비를 몰고 차 뒤로 물러가자 신기하게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멀쩡해졌었다. 

토함산에서 일출을 보겠다고 꼭두새벽에 아이들을 깨워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산길을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의지해 올라갔던 기억도 난다. 넓은 주차장에는 우리 차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산 위에는 사정없이 칼바람이 몰아쳐 몹시 추웠다. 자판기에서 따뜻한 우유와 율무차를 뽑아와서 차 안에 히터를 켜 놓고 아이들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검은 차 한 대가 올라오더니 우리 차 옆에 바짝 대는 게 아닌가? 육중한 몸집의 남자가 내리더니 운전석 쪽 창문으로 다가와 창문을 내리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아, 정말이지 너무 무서웠다. 저 어린것들을 어떻게 지켜야 하나 순간 눈앞이 캄캄했는데 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큼 열린 유리문 사이로 “주차비 내셔야 하는데예~” 하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너무 부드럽고 상냥한 경상도 말씨였다. 맙소사! 나는 율무차 한잔 하실래예~? 하고 물어볼 뻔했다. 

정신을 수습하고도 한참을 지나서야 칠흑같이 검은 하늘이 군청색이 되었다. 너무 일찍 올라왔다고 후회를 하던 참이었다. 그러더니 시나브로 쪽빛의 그라데이션처럼 하늘색이 바뀌어갔다. 아! 새벽하늘의 색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해가 고개를 내밀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진정한 일출구경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때 그 무모한 여행은 그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여행지가 그렇지만 안압지와 대릉원은 낮과 밤의 얼굴이 달랐다. 특히 밤에 천오백 년 전 고도(古都)의 거대한 무덤 사이를 걷노라면 묘하게도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안동의 고택들과 멀리 마을을 감싸고 흘러가는 낙동강, 마을의 당나무, 발길이 뜸해서인지 제삿밥 간판만 내걸어 놓고 장사를 하지 않는 식당들... 아직도 추억의 갈피에 고이 남겨져 있는 장면들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대전 근방에서 태안으로 빠지는 길을 놓쳐 또 한참을 헤맸다. 지도를 아무리 봐도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길을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이정표에 의지해서 가다가 아차 하는 순간에 진입로를 놓치기도 했다. 나중엔 아이들도 긴장해서 같이 이정표를 주시하며 남아있는 거리를 확인해줬다.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사흘을 꼬박 앓아 누웠다.  

요즘 다시 길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잘 늙는 길. 청춘들이 먹고살 길. 아이들의 진로.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
모든 길은 통하겠지만 막다른 길 만큼이나 난감한 것이 지나치게 많은 이정표다. 게다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은 지도책과 같아서 아무리 신간을 사서 봐도 현실의 변화 속도가 책보다 빠르다. 이십 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필요하면 “빠꾸”도 하고, 돌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여행의 목적과 컨셉에 대해 더 오래 생각한다. 

내게 주어진 시간과 자원은 한정되어 있으니 목적지를 분명히 하고 그에 맞는 준비를 해야 한다. 연료도, 식량도, 지도와 스페어 타이어도. 그런데 아무리 준비한다 해도 가다 보면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이 생길 것이다. 그러니 어떤 장애물과 맞닥뜨리더라도 길을 찾아낼 수 있는 나를 준비하는 수밖에.

20년 전 뒷좌석에 앉아 나와 동행해줬던 아이들은 이제 슬하를 떠나 각자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 은희경 작가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낯선 우주에 내던져진 고독한 소년들이다. 정해져 있는 길도 없고 저마다의 길도 다르다. 잠시 우리가 함께 동행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자신의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응원하고 기도하는 수밖에.


김건영
-맞춤형 성장교육 <생각과 미래> 대표
-위챗 kgyshbs   
-thinkingnfutur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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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째 아이들과 책 읽고 토론하며 글을 쓴다. 청소년들을 위한 진로 코칭과 상담을 병행하고 있다. 청소년 인문캠프, 어머니 대상 글쓰기 특강 등 지역 사회 활동을 해왔으며, 도서 나눔을 위한 위챗 사랑방 <책벼룩시장>을 운영하고 있다. 상하이저널과 공동으로 청소년들의 진로탐색을 위한 프로젝트 <청미탐>을 진행하고 있다. 위챗 kgyshbs / 이메일 thinkingnfuture@gmail.com / 블로그 blog.naver.com/txf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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