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연합뉴스) 중국 상하이(上海)에 자리잡았다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중국을 떠났던 유대인들이 상하이로 되돌아오고 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5일 지난 1999년만해도 100명이 채 안됐던 상하이의 유대인 커뮤니티가 지금은 1천500명이 훌쩍 넘을 정도로 커졌다며 유대인들의 3차 상하이 러시가 시작됐다고 전했다.
이들 상당수는 매년 30억∼40억달러의 중국산 물품을 해외로 수출하는 무역회사를 운영하거나 다국적 기업에서 임원으로 일하면서 상하이에 다시 한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상하이에 정착한 유대인 모리스 오하나는 "앞으로 상하이의 유대인 인구는 5천명까지 늘어날 것"이라며 "이렇게 되면 우리는 유대인 학교와 과거에 사용했던 유대교회당(시나고그)의 복원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 유대인 코뮤니티는 뉴욕에서 라비를 초빙, 4년전부터 매주 금요일 저녁 훙차오(虹橋)구의 한 건물에 모여 식사와 예배, 회의를 하면서 유대관계를 갖고 있다.
이들은 지금은 상하이시 교육국으로 넘겨져 빈 건물로 남겨진 유대교회당 오헬 라헬을 다시 넘겨받기 위해 시 당국에 로비를 벌이고 있다.
시 당국도 지난 99년 이들 유대인들에게 이 건물에서 신년제인 로쉬 하쉬나 축제행사를 갖도록 허용하기도 했다. 중국 내에서 치러진 50년만의 첫 유대인 종교행사였다.
유대인들은 1842년 상하이 개항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한 이후 지금까지 2차례에 걸쳐 대규모 상하이 이주를 해왔다.
19세기 후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지속된 유대인의 제1차 상하이 이주는 맨먼저 사순 일가의 주도로 인도와 바그다드를 거쳐 들어온 유대인 700명의 이주에서 시작됐다.
곧이어 1895년부터 10년 동안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이 볼셰비키혁명을 피해 일제 치하의 만주를 거쳐 상하이에 도착했다.
1930년대말까지 상하이의 러시아 유대인은 4천명을 넘어섰고 이에 따라 상하이에만 7곳의 유대교회당이 세워졌다. 이중 오헬 라헬과 오헬 모셰 등 2개만 남아있다.
2차 이주는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2만명이 당시 비자나 여권이 필요치 않았던 상하이에 한꺼번에 몰려왔던 2차대전 시기였다.
당시 이들은 사순, 카두리 두 가족의 주도하에 무역, 은행, 부동산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상하이엔 아직도 피스호텔, 메트로폴 호텔, 그로스브너 하우스, 유스센터 등 수많은 유대인 건물이 남아있다.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중국에 공산정권이 세워진 1940년대 말부터 상하이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대부분 차례차례 이스라엘이나 미국, 호주 등을 향해 떠났다.
50년만에 이들 유대인이 다시 상하이를 찾는 이유는 중국의 눈부신 경제발전과 역동성, 안전감과 함께 중국사회에 반유대주의 의식이 적은 점 등이 꼽히고 있다.
특히 유대인들의 복귀는 중국과 이스라엘간 외교관계가 지난 92년 수교 이래 급속히 해빙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80년대만해도 아랍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중국은 이스라엘을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간주하며 이스라엘 군경의 팔레스타인인 탄압을 강력히 비난했다.
그러나 90년대부터 중국의 외교정책이 실용적이고 중립적으로 변하면서 중국은 이스라엘과 유대인에게서 기술력과 자본력, 잠재적 정치력을 보게 되면서 투자와 교류가 급증하고 있다.
조부와 부친이 중국 하얼빈(哈爾濱)에 정착해 살기도 했던 에후드 올메르트가 지난 3월 이스라엘 신임 총리가 되면서 중국과 이스라엘 및 유대인 간의 관계가 급속도로 진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