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고기는 이븐even하게 익지 않았어요.”
“저는 채소의 익힘, 익힘 정도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 요리에는 킥이 없어요. 탈락입니다.”
우리 집에서 반찬 투정은 암묵적으로 금기였다. 음식에 관한 대화라고는 “맛있어? 맛있지?”라는 물음에 “응, 맛있네.”라는 정도만 오갔다. 요리에 딱히 소질도 흥미도 없는 나를 겪어 온 가족들의 생존본능이라고나 할까.
그런 남편이 요즘 식사때마다 신이 나서 진담 반 농담 반의, 어쩌면 농담을 가장한 진담의 음식평을 해댄다. 그 말을 듣고도 ‘피식’ 웃고 마는 건, 한동안 푹 빠져서 본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에 나오는 장면을 흉내 내고 있다는 걸 알아서이다.
‘흑백요리사’가 업로드되는 날 밤이면 남편과 나란히 앉아 작은 노트북 화면에 빠져들세라 시청했다. 누가 먼저 보는 것은 가정의 불화를 야기할 배신이었다. 매회 긴장감과 웃음, 감동의 인생 명언으로 가득 찼다.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마라 맛 자극과 설렁탕 같은 깊고 뜨끈함이 공존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개성 있는 캐릭터들이 여기저기서 팡팡 튀어 오르며 새로운 요리와 서사를 만들어갔다.
‘흑백요리사’는 방송 중에도 화제였지만, 끝난 후 더 화제다. 경연에 참가한 출연자들은 요즘 코미디 패러디 대상 1순위가 되어 SNS에서도 가장 핫한 스타가 되었다. 그들의 식당은 몇 개월 동안 예약이 다 찼거나 매일 오픈런에 도전해도 2~3시간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라고 한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들의 요리 맛은 별로 궁금하지가 않았다. 원래도 기본 재료에 충실한 단순한 맛을 좋아하기에 창의력을 한껏 발휘한 음식은 그저 ‘그림의 떡’ 같은 느낌이었다. 내게 이 프로그램은 인생 다큐멘터리였다. 매회 경연에 참가하는 참가자들의 태도와 그들의 인터뷰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에드워드 리’ 셰프는 이미 백악관 만찬 담당과 미국의 각종 요리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최고의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가 굳이 이 도전에 참가한 이유가 의아했지만, “제 경쟁자는 정말 저 자신 뿐이죠.”라는 이 한마디 말에 다 설명이 되었다. 그는 경연 도중 그동안 한 번도 만들어보지 않은 음식에 도전했다. 게다가 모든 요리에 한국의 맛을 접목하며 한국인으로서 정체성 찾기 여정을 이어갔다. 그런 그가 심지어 얼마나 겸손까지 하던지. 승부욕을 자극하는 젊은 셰프의 말에 그는 “그래, 한번 해 봅시다.”라고 평온하고 덤덤하게 응수했다. 그는 그저 묵묵하게 자신과의 싸움을 할 뿐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능력 있고 대단한 사람인지를 알리는 것이 당연하고, 겸손은 오히려 촌스럽게 느껴지는 요즘, 우리 아이들도 잘한 건 잘했다고 으스대기도 하고 자랑도 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다. 드러내지 않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 같아 속상하던 때도 있었다. 에드워드 리의 태도는 ‘겸손의 미학’을 새삼 깨우쳐주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남이 아닌 나와의 싸움! 상금 3억 원이 눈 앞에서 날아갔지만,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진정한 승자로 남을 것이다.
요리 앞에 열정을 활활 태우는 참가자들을 보며 나도 무엇인가에 저랬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내 꿈은 뭐였는지,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자꾸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와 비슷한 연배인 에드워드 리가 여전히 현역에서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며 가을 낙엽같이 바짝 말라버린 내 열정을 이리저리 들쑤셔 보게 된다. 조금의 불씨가 남아있을까.
“심사위원에게 가는 길은 멀었어요. 가끔은 ‘잠깐만, 돌아가서 뭔가 고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하지만 한 번 걷기 시작하면 끝까지 가봐야 하는 겁니다. 해봅시다.” (에드워드 리)
올리브나무(littlepo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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