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0일은 중국 ‘스승의 날’이었다. 중국의 소수민족 언어 정책, 한국의 교권 추락 뉴스 등을 접하면서 학창시절 나의 선생님에 대한 추억에 잠겨 본다.
대학교 때 우리 반 담임을 맡으셨던 분은 김도권 선생님이셨다. 교수 시절 마지막으로 담임을 맡으셨던 게 우리 반이라 그런지 우리한테 사랑과 애정 어린 조언을 듬뿍 주신 분이다. 주말이면 우리 반 친구들은 자주 선생님을 찾아 뵙고 시끌벅적하게 떠들곤 했다.
선생님도 그때 청춘들과 같이 술도 한잔하시며 담소를 나누는 시간을 즐기셨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우리를 항상 따뜻하게 보듬어 주시던 선생님과 사모님은 학자로서 연구에 매진하셔야 할 아까운 시간과 에너지를 우리한테 흔쾌히 써주신 거였다. 이런 선생님과 사모님께 훗날 감사의 인사를 드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한국에서 살 때 두 분의 너무 때 이른 부고를 충격 속에 연이어 접했다.
대학교 2 학년 때 우리 반 한국사를 가르쳐주신 황유복 선생님은 첫인상에 몽골 대장군 같은 풍채가 느껴졌다. 초봄에 멋진 코트를 입고 오신 선생님은 그때부터 팔순을 앞두신 지금까지도 '도민준' 헤어 스타일을 하고 계시는 참 세련된 분이었다.
선생님은 수업 때마다 항상 커피를 가져와서 학생들에게 권하셨다. 90년대 중반의 베이징은 커피가 꽤 귀한 기호식품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유학을 결정하면서 용기를 내어 선생님께 추천서를 부탁드렸더니 흔쾌히 수락해 주셨다. 그러나 그때 철이 없었던 나는 힘든 공부가 싫어서 두 학기 만에 대학원 공부를 포기하고 말았다. 선생님은 이런 나를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선생님 명성에 누를 끼쳤다는 죄스러운 생각과 나의 초라함에 문득문득 마음이 괴로웠다. 몇 년 전 상하이에 강연하러 오신 선생님을 찾아뵙고 용서를 구할 수 있었다.
또 인상 깊은 선생님은 현재 연변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는 이충실 선생님이시다. 그때 중학생이 된 우리의 첫 조선어 선생님이셨다. 갓 부임해 온 총각 선생님이신 이충실 선생님은 저녁 자습 시간이면 우리한테 '선녀와 나무꾼', '춘향전' 등 옛 이야기들을 구수하게 해주셨다. 연변 사투리를 쓰시는 선생님은 흥이 날 때면 민요까지 한 곡 뽑으셨다. 목소리가 우렁차셨고 노래도 신명 나게 참 잘하셨다. '방자전' 노래를 지금도 기억한다. “어서 가자, 나귀야, 어서 가자 나귀야……”
거의 다 길림 교외 촌구석에서 시내에 입성한 아이들한테 이렇게 격의 없이 소탈하고 낭만적인 선생님을 만난 건 얼마나 생경하고 놀랍고 신기한 체험이었던가. 2년 정도 우리를 가르치신 선생님이 연변으로 전근을 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섭섭했다. 시간이 지난 후에 연변에 여행갈 때 선생님을 찾아 뵈었더니 우리를 가르치실 때 한 번은 욱해서 어떤 남학생을 때렸는데 그게 가장 후회가 된다고, 그 학생을 만나면 꼭 선생님의 사과를 전해 달라고 하셨다.
그간 많은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았다. 저마다의 개성을 지니고 계시지만 학생들한테 마음을 다하는 모습은 똑같이 닮으셨던 분들이다.
며칠 전 스승의 날이 더욱 뭉클한 감동과 착잡함으로 다가온 것은 확실하게 변화가 생긴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 관련 언어정책으로 우리 민족의 삶에도 큰 파장이 예고되기 때문이다. 동북 지역에 사는 우리 아이들은 앞으로 내가 학교 다니던 그때처럼 귀에 쏙쏙 들어오게 우리말로 수업을 해주시며 우리만의 정서와 향수를 끊임없이 일깨워 주시던 우리 선생님 같은 분들을 그렇게 많이, 그렇게 쉽게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더욱 가슴을 저리게 만든다.
또한 교권 추락 뉴스를 연일 보도하는 한국 상황도 안타깝고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스승과 제자 사이가 지식을 주고받는 관계라지만, 한 사람의 삶에 있어서 학창시절은 인생의 초년기에 인간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쌓아가는 시기다. 학생의 인권 보호도 중요하지만, 가장 소중한 내 아이를 맡겨야 하는 상대인 교사에 대한 보호와 존중도 바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소이(mschina052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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