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스토리 in 상하이] 너의 이름은

[2023-04-07, 07:53:33] 상하이저널

강산도 변하는 긴 시간을 이곳, 중국에서 보내며 수많은 파도를 넘나들며 지내왔다. 긴 시간에서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언어의 장벽이었다. 중국어 교재를 들었다 놨다 하기를 수차례. 결국 책장 구석에 쓰윽 밀어 넣은 지 오래다. 일상생활정도야 눈치 8단과 전 세계 공통어인 보디랭귀지로 넘어가지만 문자를 사랑하는 내게 까막눈으로 산다는 것은 마음이 시린 일이다. 인천공항에 내리면 자연스럽게 읽히는 표지판과 광고들 지극히 당연한 풍경에 눈시울이 붉어졌던 기억이 나만의 것이 아닐 터.

나는 한글 캘리그래퍼이다. 문자를 빌려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캘리그래피. 나의 내일에 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은 점점 커져간다. 의미 전달을 위한 문자로의 한글을 넘어 우리말이 가지고 있는 점, 선, 면의 미에 매번 감탄하게 된다. 내게 한글의 소중함은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 고유의 문자인 한글. 세종 대왕이 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해 창제한 훈민정음을 20세기 이후 달리 이르는 명칭이다. 소리를 내는 우리 몸의 기관들을 본떠 만든 자음과 하늘, 땅, 인간을 어우러짐으로 탄생한 모음으로 우리 말 모두를 쓸 수 있다. 우리 말뿐만 아니라 세계의 여러 가지 말소리를 간편하게 나타낼 수 있다. 예를 들면 홍콩에서 태어난 옆집 가족의 이름을 들리는 그대로 적을 수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삼척동자도 줄줄 읊어낼 위대한 한글 타령. 한글날은 10월인데 꽃비 내리는 봄날 우리말을 향한 애정공세가 웬 말이냐 싶을지 모른다.


지난 3월 말 두 아이의 학교에 코로나 이후 가장 큰 행사인 ‘인터내셔널 데이’가 열렸다. 다국적 아이들이 모여 공부하는 국제 학교의 가장 큰 행사가 아닐까? 아시아계 학생들이 많은 학교에서 우리나라만의 특색을 잘 드러내기 위한 게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반짝하고 내 머릿속에 전구가 켜졌다. 

‘그래 우리말이 가지고 있는 우수성을 알리자. 모든 소리를 문자화할 수 있고 이를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거야.’

한글로 아이들의 이름을 써 주기로 했다. 색동과 태극을 응용해 캘리그래피를 그려낼 종이들을 수백 장 준비했다. 장식하기 위해 색종이로 한복과 복주머니를 일일이 곱게 접었다. 천개 가까이 손수 접기 위해 한 달 동안 학교 엄마들이 함께 애써주었다. 이 많은 것들을 직접 준비했으리라 아무도 생각 못 할 것이라며 3월 가내수공업 공장의 레일은 매일 밤 돌고 돌았다. 행사 전날 준비한 것들을 챙기며 맘 한편에는 호응이 적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가득했다. 아자아자! 최선을 다하자! 파이팅을 외치고 행사장으로 들어오는 학생들과 교사, 학부모들의 이름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감사하게도 자신의 이름은 물론 가족들의 이름, 친구에게 선물할 생일 메시지 등을 부탁하는 학생들까지. 준비해 간 용지가 다 떨어져 주변의 스케치북의 잘라 한글을 그려나갔다.

3월을 탈탈 털며 준비한 인터내셔널 데이. 캘리 부스뿐 아니라 우리나라만의 색채가 느껴지는 멋과 맛으로 코로나 기간 동안 켜켜이 쌓아왔던 열정을 고스란히 피워냈다. 각국의 색채가 어우러진 행사장은 흡사 올림픽 폐막식을 방불케 하는 흥이 가득했다. 하루가 저물어가는 늦은 오후 아쉬움을 뒤로하고 굿바이 노래를 크게 부르며 모두들 내년을 기약하며 만세를 불렀다. 진정 보디랭귀지로 하나가 되었던 날. 서로를 향한 미소로 너와 내가 우리가 되었던 그날의 한 조각에 우리말과 함께 있었음이 꿈만 같았다.

화몽(snowyso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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