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이야기④]
백묵이냐, 분필이냐
백묵(白墨), 흑판(黑板)... 이런 말을 무심코들 쓰시지요? 오늘은 이걸 한번 따져봅시다.
분필은 하양뿐 아니라 빨강 파랑 등 여러 가지 색이 있습니다. 이를 ‘빨간 백묵’, ‘파란 백묵’이라고 쓰자니 정말 어색합니다. ‘백묵’이란 말에 이미 빛깔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청묵', '홍묵' 하는 것도 우습고...
또, 요즘 교실 앞뒤의 칠판은 거의 다 초록색이지요? 이 또한 '흑판'이라고 하자니 안 맞고, 그렇다고 ‘녹판(綠板)’이라고 하기도 그렇습니다.
사실 이런 말은 일본에서 만들어 우리나라로 넘어온 것들입니다. 백묵, 흑판이라는 말이 일본에서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분필(粉筆)’, ‘칠판(漆板)’이라고 썼습니다. 이는 각각 ‘칠을 한 판자’, ‘가루로 만든 붓’이라는 뜻이니, 애당초 어떤 색이든 상관없습니다. (‘漆’은 원래 옻칠을 뜻하는 한자이지만, 굳이 한자가 아니라 순 우리말로 보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봅니다.
일본 사람들은 사물을 겉으로, 감각으로 받아들여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현상이 조금 변화하자 표현 전체가 부정확해졌습니다.
이에 비해 우리는 그 본질을 가지고 이름을 붙인 까닭에 겉모습이 웬만큼 변해도 그 내용을 정확히 드러냅니다. 심지어 요즘 새로 나온 화이트보드 같은 것도 ‘칠판’이라고 쓴다 해도 큰 문제가 없습니다.
이런 사소한 일로 거창하게 민족성까지 들먹이는 것은 물론 무리겠지만, 역사적 진실을 외면한 채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만 가지고 장난치는 일본 우익들을 보면서, 일본인들은 대체로 본질보다는 외면(명분)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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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1980년 이후 현재까지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다. 1987년부터 1990년까지 <전교조신문(현 교육희망)>에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월간 <우리교육> 기자 및 출판부장(1990~1992), <교육희망> 교열부장(2001~2006) 등을 역임했다. 1989년 이후 민주언론운동협회가 주최하는 대학언론강좌를 비롯하여 전국 여러 대학 학보사와 교지편집위, 한겨레문화센터, 다수 신문사 등에서 대학생, 기자, 일반인을 대상으로 우리말과 글쓰기 강의를 해오고 있다. 또한 <교육희망>, <우리교육>, <독서평설>, <빨간펜> 등에 우리말 바로쓰기, 글쓰기(논술) 강좌 등을 기고 또는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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